항목 ID | GC40002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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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丙五 |
영어공식명칭 | Seo Byeongo |
이칭/별칭 | 서병로(徐丙潞),순원(舜原),석재(石齋),석재거사(石齋居士),석과(石果),죽서도인(竹書道人),청전(靑篆),팔능(八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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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서병오 국채보상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서병오 대한협회 대구지회 회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서병오 교남시서화연구회 창립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서화가|민족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교남서화연구회 회장|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
개항기 대구 출신의 서화가이자 민족운동가.
서병오(徐丙五)[1862~1936]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대구 지역 서화계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서병오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순원(舜原), 호는 석재(石齋)·석재거사(石齋居士)·석과(石果)·죽서도인(竹書道人)·청전(靑篆) 등이다. 어릴 적 이름은 서병로(徐丙潞)이고, 아버지는 서상민(徐相敏)이다. 시·글씨·그림·가야금·장기·바둑·의약에도 능통하여 팔능(八能)이라고도 불렸다.
서병오는 1862년(철종 13) 9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07년 2월 17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 회원이었던 서병오는 광문사(廣文社)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을 비롯한 회원 김병순(金炳淳)·장상철(長相轍)·강신규(姜信圭)·강영주(姜永周)·김우근(金遇根)·심정섭(沈廷燮)·윤하선(尹夏璿)·정재덕(鄭在悳)·이종정(李鍾楨)·길영수(吉永洙)·이우열(李遇烈)·정규옥(鄭圭鈺)·추교정(秋敎廷)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공표하고 국채 보상에 필요한 모금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서병오가 발기인 1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평소 행서(行書)를 잘 썼으며 사군자(四君子) 그림에 탁월했던 서병오는 1922년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곽석규(郭錫圭)·김진만(金鎭萬)·배효원(裵孝源)·서병주(徐炳柱)·서상하(徐相夏)·허섭(許燮) 등과 교유하면서 대구 지역 서화계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제자로는 서동균(徐東均)과 성재휴(成在烋) 등이 있다. 서병오는 1936년 3월 6일 사망하였다.
1983년 6월 22일 대구 달성공원 내에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