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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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孫季進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Son Gyejin |
이칭/별칭 | 「손계진에게 답하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답손계진」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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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답손계진」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답손계진」 저자 정구의 『한강집』 간행 |
배경 지역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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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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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성격 | 서간류|서 |
작가 | 정구 |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만년에 강학 활동을 펼쳤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손린에게 보낸 격려 편지.
「답손계진(答孫季進)」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손린(孫遴)[1566~1628]의 본관은 일직(一直)이고, 자는 계진(季進)이며, 호는 문탄(聞灘)이다. 정구의 문인이며, 대구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탄집(聞灘集)』이 있다.
윤효전(尹孝全)[1563~1619]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초명은 윤효선(尹孝先)이다. 자는 영초(詠初)이며, 호는 기천(沂川)이다. 1617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2001년 발행한 『국역 한강집』에서는 「답손계진」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손계진에게 답하다」라고 표기하였다.
「답손계진」은 정구가 손린에게 당부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답손계진」의 전문이다.
“계림(雞林)[윤효전]이 누차 그대가 존경할 만하고 강설(講說)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말하니 매우 흐뭇하네. 효전이 지방 관리가 되어 주위에 함께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어 고민스럽던 중에 이처럼 마음에 드는 새 벗을 얻었으니 매우 즐거울 것이네. 다시 바라건대, 더더욱 노력하여 학문을 더 진보시킴으로써 그 근본을 두텁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아울러 향교의 후생도 외면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어떠한가. 관장하고 있는 각 군현(郡縣)의 후학들에 대하여서도 수시로 순행하며 학문을 권장함으로써 조정이 그대를 내보낸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매우 고맙겠네.”
「답손계진」에서 손린에게 한 진심 어린 조언은 정구의 삶의 지향과 일치한다. 학문에 근본하여 진일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답손계진」은 정구의 학문과 삶의 지향이 드러난 작품이며, 동시에 대구와 경상북도 동남 지역의 사승(師承) 관계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