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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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祭泗水主山文 漆谷 |
영어공식명칭 | A funeral oration to Sasu river and Jusan mountain |
이칭/별칭 | 사수의 주산 신에게 올리는 제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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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제사수주산문 칠곡」 저자 정구의 『한강집』 간행 |
배경 지역 | 정구 강학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성격 | 애제문|제문 |
작가 | 정구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조선 후기 학자 정구가 거처를 옮기면서 산신에게 올린 제문.
[개설]
「제사수주산문 칠곡(祭泗水主山文 漆谷)」을 쓴 정구(鄭逑)[1543~1620]는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구성]
「제사수주산문 칠곡」은 사수로 이거하게 된 계기와 터 잡아 잘 살게 하여 달라는 바람을 드러낸 제문이다.
[내용]
「제사수주산문 칠곡」의 전문이다.
“삼가 저는 일찍이 노곡(蘆谷) 남산촌(南山村)에 우거하였는데, 겨우 두 해 만에 갑자기 화재를 만나 서적이며 모든 물건을 소실하여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바라보면 참혹하고 마음은 놀라 차마 이어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와서 산 아래에 새로이 터를 잡고 사당과 집을 지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습니다. 신령께서는 보우하여 주시고 저에게 몸 편히 업을 닦게 하여 주신다면 아마 허물과 후회가 없게 평생의 뜻을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술과 과일을 올려 신령께 고하노니 굽어 살펴 주시고 흠향하소서. 삼가 고합니다[伏以逑曾寓蘆谷之南山村, 纔閱兩歲, 忽被火災, 書籍什物, 盡灰無餘. 慘目驚心, 不忍仍居. 玆來新卜於山之下, 爲建祠築室, 以終餘年之計. 靈其保佑, 使之安身修業, 庶無罪悔, 以畢平生之志. 玆用酒果, 籲告于神, 冀神鑑饗謹告].”
[특징]
「제사수주산문 칠곡」에서는 일의 사정과 정구의 바람을 산문 형식으로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사수주산문 칠곡」은 정구가 거주지를 옮기면서 이거 연유와 옮긴 곳에서의 평안을 바라면서 지은 제문이다. 축문은 대상과 지역에 따라 형식이 다양한데, 후대로 오면서 간략화되는 경향이 있다. 「제사수주산문 칠곡」은 운문 형식이 아닌 산문 형식으로 내용이 매우 간명하다. 대구 지역의 이거 시에 쓰는 축문 양식과 풍습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