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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달성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73
한자 崔誡[達城郡]
영어공식명칭 Choi Gei
이칭/별칭 사훈,태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7년 - 최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최계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최계 권지 훈련원 봉사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592년 7월 24일 - 최계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대구 의병 가장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605년 4월 16일 - 최계 선무 원종공신 2등에 녹권됨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최계 만경 현령에 제수됨
몰년 시기/일시 1622년 11월 10일 - 최계 사망
출생지 최계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거주|이주지 최계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활동지 팔공산 - 대구광역시
활동지 최계 활동지 -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묘소 최계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성격 무신
성별
대표 경력 선무 원종공신|증 병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훈(士訓), 호는 태동(苔洞).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최해(崔海)이며, 아버지는 내금위 최종옥(崔宗沃)이다. 어머니는 하희수(河希壽)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로 최종옥의 둘째 부인이다. 부인은 설근(薛勤)의 딸 순창 설씨(淳昌薛氏)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생원 최동율(崔東嵂)이며, 둘째 아들은 대군 사부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셋째 아들은 진사 최동직(崔東𡸜)이다. 최동집의 손자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며, 최동집 이래로 후손들이 대구의 옻골[칠계(漆溪)]에 모여 살았다.

[활동 사항]

최계(崔誡)[1567~1622]는 1591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둘째 형 최인(崔認)과 조카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2년 7월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대구 의병 가장(大丘義兵假將)으로 차출했으며, 이후 금호강(琴湖江)과 팔공산(八公山) 및 경산, 달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의병 가장으로 임명된 후 팔공산에서 세운 전공으로 주부(主簿)로 승진된 뒤 의주(義州)로 가서 왕을 모시게 되었다. 이때 대가(大駕)가 환도할 때 남은 적을 격파하여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다. 1596년[선조 29] 통신 정사 황신(黃愼)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왔으며, 1607년[선조 41] 만경 현령(萬頃縣令)에 제수되었다. 이후 1618년[광해군 10] 훈련도감 파총(把摠)으로 있으면서 수군의 모집에 우수한 업적을 올려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어, 정3품 당상 천총(千摠)이 되었다. 하지만 북인 정권의 전제에 반발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저술 및 작품]

후손 최영진이 1847년 유문을 엮어서 『태동 최선생 실기(台洞崔先生實紀)』를 편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181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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