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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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承湖 - 東湖 李(竹/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승호 곁에 먼저 자리잡은 동호 이서
〔삼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성주군 고탄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광산이씨 집안에서 강을 건너와 승호 곁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인물은 동호 이서였다. 이서는 당대 성주지역에서 학문과 효행으로 유명하였던 삼처사 가운데 한분인 모재 이홍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한강 정구의 뜻을 이어〕
이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함을 보였다. 아버지 형제들이 집안의 사위였던 한강 정구와 학문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이서도 한강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통천 현감으로 있었기에 가족들과 서로 만나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어렵게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종사관으로 크게 활약했던 용담 박이천의 도움을 받아 수원에 머무르면서 예전 공부를 되돌아보고 정리하였다. 1600년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 때 죽은 이들을 조문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집안을 살폈다. 1605년 문과 진사시에 합격자 12명 가운데 2등을 하였다. 1609년 황산 찰방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전쟁 이후 세상은 혼란스러워졌고, 스승 한강 정구 선생 또한 야인(野人)이 되어 숨으니 이서 또한 관직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여러 학문의 동지들과 더불어 인근 가야산을 주유하면서 글을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한강 정구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서 또한 스승의 뜻을 지극히 받들면서 『오선생예설』 편찬에 참여하였다.
1620년 스승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깊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이윤우 등 여러 동학(同學)들과 의논하여 회연서원을 창건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나아가 스승의 학문성과를 모아 『한강언행록』을 간행하였다. 이서는 스승 한강에 대해 “퇴계는 주자 이후 첫째가는 사람이고 선생(한강 정구)은 퇴계 이후에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흩어 진 마음을 거두는 수방심(收放心)의 공부를 가장 중히 여기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하였다.
〔승호 곁으로 이주하여〕
이서는 1626년 호성공(扈聖功)으로 육품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후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와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도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부터 관직 진출의 뜻은 접어버리고 향촌에서 학문에 힘쓰고 제자를 기르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당시 성주 고탄에서 낙동강을 건너와 승호(承湖, 씩늪) 위쪽에 집을 짓고 스스로 동호(東湖)라 호를 정하였다. 낙동강이 만든 승호를 보게 되었고, 또 산을 보고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였던 것이다. 이서는 승호 곁에 집을 지어 제자들을 기르는 일에 힘썼다.
1650년 나이 80세에 우로(우로)의 법에 의해 통정(통정) 계자를 입었고 절충호군이 되어 나이와 덕과 벼슬이 함께 높아 사람들이 삼달이라 하였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밝은 얼굴에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1651년 8월 병환을 얻어 제자들이 의원을 청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미 하늘이 정한 나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고종명(考終命)이라, 다시 약을 써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10월 초 하루에 별세하였다.
이듬해 정월 승호 동쪽 묘향원에 장례를 지내고 박기문 등 제자들이 시호를 덕요(德耀)선생으로 하였다.
〔회연서원에 스승과 함께 배향되고〕
이서 선생은 선비로서 기본 덕목인 경과 의의 실천을 평생 행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정성으로 아래 사람을 대하였고, 집안 내에 덕을 나누었고 밖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여 모범을 보이니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그의 문장은 쉬운 문장이면서도 격을 갖추었다. 여러 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혼탁한 정치 현실 가운데 받는 녹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벼슬에 나가고 물러남을 잘 살폈다.
정구 사후 성주지역의 문인들 사이에서 리더로서 문파의 결속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서는 지역 유림들에 의해 부친 이홍우와 백부 이홍기, 이홍량과 더불어 회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 문헌〕
李禹鉉 主幹, 『光山李氏世稿 國譯全』 (西大邱印刷所, 1986)
추제협, 「회연서원의 경영과 유현들」(『한국학논집』 57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