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광영을 추모하는 임호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B010107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이광영을 추모하는 임호재

〔씩실마을의 재실들〕

삼리1리 씩실마을은 고령군 성산면 고탄동에서 건너온 광산이씨 일족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 그로 인해 마을에는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들을 기리는 재실등을 많이 건립하였다. 1970년을 전후하여 위은(渭隱) 이세환의 추모재사인 비락재(琵洛齋), 이달은과 이달민의 추모재사인 서락재(棲洛齋), 이당의 추모재사로 광거재(廣居齋)등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의 이주와 마을의 변화가운데 대부분 없어져 버렸으며 1968년에 건립된 이병기의 추모재사인 일우재(一愚齋)와 임호재(臨湖齋) 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승호 곁에 세워진 임호재〕

임호재(臨湖齋)는 삼리1리 씩실마을의 기틀을 다진 양촌 이난미의 장남인 장사랑(將仕郞) 이광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재실이다. 마을이 승호 옆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건물 이름에는 물가 호(湖)자가 많이 들어간다.

임호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지붕 아래 서까래를 받치는 종도리 장혀 아래에 ‘정사 윤이월 십칠일 입주 이십일일 상량(丁巳 閏二月 十七日 立柱 二十一日 上樑)’이란 상량문이 적혀있다. 이는 1917년으로 추정되는데, 고쳐 지은 시기로 보여 진다.

[마을 서당의 역할을 한 임호재]

이러한 임호재는 중건 전후로 서당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달성군을 비롯하여 성주 등지에 까지 글씨로 이름을 떨쳤던 우당 이후현이란 분이 서당의 훈장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현이란 분이 조부님인데, 호가 우당(愚堂)이라. 이 분이 당시 글씨도 유명한 분이었는데 세필(細筆)을 잘 썼어요. 김해 김씨 족보도 직접 쓰고... 이 할배가 임호재에서 집안 아이들 뿐 아니라 가까운 마을의 학생들도 가르치곤 했어요. 나도 어릴 때 좀 배웠지, 천자문도 배우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배웠어요. 학교 다녀와서 배우기도 하고. 당시 학생 수는 15명에서 20명 정도였지. 여자들도 많이 배웠어요...동몽선습이나 천자문도 배우고 맹자도 여기서 읽었어. (이영수, 남 73세)

〔임호재의 구조〕

임호재는 씩실마을의 마을뒷산의 끝자락에서 승호(承湖, 씩늪)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주변에 공장이 들어와 옛 정취가 덜한 감은 있으나 건물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임호재는 정면에 전툇간(前退間)을 둔 일반적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즉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 온돌방은 좌측면에 벽장을 두어 다소 이색적인 면을 보이고 있으며, 우측 방은 뒤편에 벽장을 두었다. 경사진 지붕을 위해 상부 구조는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를 세 줄로 걸어 만든 삼량가(三樑架) 방식이며, 기둥을 끝을 두루뭉술하게 처리한 무익공 소로(小累)수장 형식이다. 임호재 내부에는 서흥인 김건영이 쓴 기문이 있다.

〔참고문헌〕

달성마을지편찬위원회, 『달성마을지』(달성문화원, 1998)

달성군청,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달성을 빛내다』(달성백서편찬위원회, 2014)

〔정보제공자〕

이영수(남, 1939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광산이씨 중파 14대 종손)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