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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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誡[東區] |
영어공식명칭 | Choe Gye |
이칭/별칭 | 사훈(士訓),태동(台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567년 7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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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최계 별시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최계 대구 의병 가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최계 만경 현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0년 - 최계 통정대부 승진 |
몰년 시기/일시 | 1622년 11월 10일![]() |
출생지 | 최계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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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최계 부임지 - 서울특별시 |
부임|활동지 | 최계 부임지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
묘소|단소 | 최계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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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최계 배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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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만경현령 |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무신.
최계(崔誡)[1567~1622]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사훈(士訓), 호는 태동(台洞)이다. 최계는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7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 최자하(崔自河)는 선공감 감역(監役)을 지냈고, 할아버지 최해(崔海)는 발포 만호(鉢浦萬戶)를 지냈으며, 아버지 최종옥(崔宗沃)은 감찰(監察)을 지냈다. 어머니는 창신교위(彰信校尉) 하희수(河希壽)의 딸인 진주하씨(晋州河氏)이다. 부인은 창신교위(彰信校尉) 설근(薛勤)의 딸인 순창설씨(淳昌薛氏)인데 슬하에 세 아들 최동률, 최동집, 최동직과 서강인, 정천섭에게 출가한 두 딸을 두었다.
최계는 1591년(선조 24)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奉事)를 맡았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둘째 형 최인(崔認), 조카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창의하였으므로 ‘최씨 삼충(崔氏三忠)’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초유사(招諭使)인 김성일(金誠一)이 최계를 대구[현 대구광역시]의 의병 가장(義兵假將)으로 삼았다. 이에 공로가 많아서 주부(主簿)와 판관(判官)에 오르고 1605년에 선무 2등 공신에 녹훈되었고, 1607년에 만경 현령(萬頃縣令)이 되었다. 현령으로 정무를 다스릴 때 청간(淸簡)을 우선으로 힘썼으니,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고 한다.
최계는 무신이었으나, 1609년 만경 현령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는 무(武)에서 문(文)으로 뜻을 바꾸어 여러 아들에게 엄격하게 공부하게 하고,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의전(義田)을 두어 책과 양식을 갖추고서 의리를 강론하도록 자손들에게 당부하였다.
최계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해북촌(解北村) 수태동(水泰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최흥원(崔興遠)이 지었고, 묘지명(墓誌銘)은 류심춘(柳尋春)이 지었다.
최계는 1605년에 선무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1812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삼충사(三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