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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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恩賜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일수 |
건립 시기/일시 | 1909년 - 대구 은사관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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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대구 은사관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 |
성격 | 건물 |
양식 | 한옥 |
[정의]
개항기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대구 방문 기념으로 내린 은사금과 지역 인사의 기부금으로 대구 공중의 이용 장소로 지은 건물.
[개설]
대구 은사관은 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남순(南巡)할 때 대구를 방문하여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하사한 2,000원을 기초로 지역 인사의 기부를 받아 건립한 건물이었다. 대구 은사관은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회관으로 사용되다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해산된 뒤 민단소의 관리로 운영되었다. 대구 은사관은 1919년 3·1운동 이후 대구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등 각종 사회운동단체들의 공간이나 무산 아동의 노동야학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대구 은사관은 1930년대 초반 대구 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이 대부분 해소되자 대구노동회가 1931년에 대구노동학원으로 운영하였다. 1932년 9월 ‘대구노동회의 횡령 사건’ 이후 대구노동회가 일제 관헌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고 대구노동학원이 폐쇄되면서, 대구 은사관은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대구 은사관은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에 건립되었다.
[변천]
대구 은사관이 1930년대 초에 세금을 체납하자 대구부가 은사관 대지 32평[106㎡]을 경매하였다. 대구 은사관은 1937년 대구경찰서, 대구부 등 일제 관헌에 의하여 3만 원의 금액으로 일반에 매각되었다. 매각 대금에서 1만 원은 각종 부채와 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만 원은 사회사업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대구 은사관은 한옥 형태로 세워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 은사관은 대한제국 말기에 건축되고,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이 활동한 공간으로 독립운동의 전개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곧 대구 은사관은 대구 사회운동의 중심지이자 핵심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