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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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明洞 -大邱廣域市 南區 大明洞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얽힌 역사와 발전상.
[개설]
대구광역시 남구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대명동은 행정구역상 11동까지 있으며, 오랜 역사만큼이나 주요한 명소들이 있다.
[대명동의 역사와 현황]
면적 10.1㎢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은 조선시대부터 대구부 상수서면의 지역으로 ‘대명골’이라 불렸다.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대덕산성(大德山城)은 통일신라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명동에 있는 대덕산 정상에서 북쪽의 계곡을 감싸며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앞산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남구 대명6동 산226의 안일사에는 조선시대의 불상인 대구 안일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명동은 무형문화재도 여럿 배출하였다. 먼저 판소리 분야의 이명희와 주운숙은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소재지가 남구 대명5동 1682-20이다. 흥보가의 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 이명희 명창은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명창 김소희로부터 전수받은 동초제 판소리를 계승하고 있다. 주운숙 명창은 이일주 명창에게서 동초제 판소리 심청가를 전수받아 계승하였다.
대명동에는 앞산공원이 있다. 앞산공원은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특히 앞산전망대에 올라서면 대구광역시의 주요 명소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명동에는 교육기관이 많은 편이다. 대구광역시달성교육지원청과 대구교육대학교, 계명대학교 대명캠퍼스, 대구대학교 대명캠퍼스, 영남대학교 대구캠퍼스, 영남이공대학교 등이 줄지어 있다. 또한 대구의 대표적인 대학병원에 속하는 영남대학교병원,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등도 대명동에 있다.
지하철 1호선이 관통하며,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은 대구광역시 남구 관내를 총 6정류장 지나는데, 서부정류장역[대명동 1288], 대명역[대명동 1291-1], 안지랑역[대명동 1291-13], 현충로역[대명로 222], 영대병원역[대명동 224], 교대역[대명동 1982-11] 등 6곳 모두 주소지가 대명동이니 얼마나 크게 펼쳐진 동네인지 짐작할 만하다.
[두사충이 선택한 대명동]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두보의 21세손 두사충(杜師忠)은 조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명나라 두릉 출신인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명나라의 원군으로서 조선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가 하면 명군과 조선군이 합동작전을 할 때 전략 전술상의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지형을 살펴 진지에 적합한 터를 잡아 주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수군을 총괄하던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맺기도 한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에도 조선을 찾는 등 각별한 애정을 쌓게 되었다. 충무공은 명나라의 장수가 두 번씩이나 먼 전쟁터에 달려와 도와주자 감사한 마음에 한시를 지어 표현할 정도였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두사충은 심경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 죽은 목숨이며,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는 계기를 맞는다. 더군다나 고국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시점이었기에 청의 신하로 살아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유재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기로 결정하고 대구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풍수지리 전문가인 두사충이 보기에 조선팔도에서 대구가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두사충이 대구를 처음 찾은 것은 남쪽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군대가 작전을 펼칠 때였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두사충은 풍수지리적 관점으로 대구의 지세를 살펴 두었다.
두사충이 처음 자리 잡은 터는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해당한다. 두사충은 살기로 한 땅에 경상감영이 들어선다고 하자 순순히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집터를 옮기게 된다.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집 주위에 뽕나무를 워낙 많이 심어 지금도 ‘뽕나무 골목’으로 불린다. 두사충은 뽕나무를 통하여 누에를 치고 길쌈을 권장하여 집집마다 의복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두릉두씨가 살던 계산동 세거지에는 1902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이 있다.
두사충으로서는 조선 정부의 배려로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고향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몸은 편안해도 마음이 무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두사충의 눈에 들어온 터가 있었으니 지금의 앞산 아랫동네였다. 당시 최정산이라 불리던 현재의 대덕산 아래로 집을 옮기고, 고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의미에서 마을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부르게 된다. 대명동이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는 사실은 대구 시민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두사충은 매월 초하룻날이면 제단을 쌓아 관복을 입고 명나라의 천자가 살던 북녘땅을 향해 배례를 올리는 등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자주 표현하였기에, ‘대명처사(大明處士)’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명단(大明壇)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오랫동안 ‘대명골’이라 불렸으며, ‘대명골’이라는 지명에서 지금의 대명동이 되었다. 두사충의 안목에 걸맞게 대명동은 무려 11동까지 생길 정도로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동이 되었다.
[빼앗긴 대명동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가 낳은 시인으로 이상화는 첫 손가락에 꼽힌다. 대구광역시에서는 2005년부터 수성구청의 주관으로 상화문학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세미나, 시낭송대회, 백일장, 문학의 밤 등 다양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민족시인 이상화는 불과 6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식민지 시대에 쓰인 대표적인 저항시로 분류된다. “지금은 남의 땅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되는 시에는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 같은 장소가 나온다. 국토를 빼앗긴 민족현실을 ‘빼앗긴 들’로 비유한 것인데 실제 공간적 배경이 어디인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있어 왔다. 상화문학제를 주관하는 수성문화원에서는 창작 배경을 대구광역시 수성구 들안길 일대로 보고 있으며 옛 수성 들판이 바로 빼앗긴 들이라고 여긴다.
한편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앞산 아래의 보리밭 일대가 ‘빼앗긴 들’이라는 주장 또한 유력하다. 이상화 시인의 동생이었던 이상백[1904~1966] 박사가 말년에 발표한 신문 칼럼에서 밝힌 내용 때문이다. 형 이상화 시인처럼 문학청년이었던 이상백 박사는 1962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에 「꿈같이 희미한 기억」이라는 글을 실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이다”라는 대목과 더불어 대명동 일대에 대한 추억을 담은 것이다. 실제로 시가 발표된 1926년 경 대명동은 일본군에 의하여 경비행장이 생겨나고 탄약고, 훈련장까지 들어서면서 ‘빼앗긴 들’이 된 것이 사실이므로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핫플레이스 대명동]
대구 시민들에게 대명동은 앞산을 오를 때에도, 대덕문화전당에 갈 때에도, 외식을 하러 나설 때에도,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주로 찾는 장소다. 이에 따라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의 안지랑 곱창거리, 대명동카페거리, 앞산공원전망대, 앞산맛둘레길 등은 이미 명소로 자리 잡았다.
[대덕식당]
대명9동의 대덕식당은 4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로 유명하다. 가마솥에 사골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어 우거지와 선지를 넣고 끓인 선지국밥이 주 메뉴이다. 서민 음식인데다 365일 24시간 영업이라 주민부터 등산객까지 두루 사랑하는 식당이다. 1979년 성질분이 문을 연 이래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안지랑곱창골목]
안지랑오거리에서 앞산 안지랑골로 통하는 길 중간에는 곱창집이 50여 곳 늘어서 있어서 안지랑곱창골목으로 불린다. 1979년 안지랑시장에 문을 연 충북식당에서 시작된 곱창 메뉴는 1998년 IMF 여파로 경제가 위축되자 값싼 안주로 서민들이 찾게 되었다. 1인분씩 시키는 다른 지역과 달리 안지랑곱창골목의 메뉴판에는 저렴한 금액으로 ‘곱창 한바가지’를 팔고 있어 이색적이다. 최근 들어서는 감성적인 카페가 들어서는 등 젊은 층이 더욱 주도하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으며 2012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전국 5대 음식테마거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뒤이어 2015년에는 한국관광100선에 선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어 대구시민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안지랑곱창골목의 점포들은 국내산 곱창과 재료들을 공동으로 구매하되 화력, 양념, 장맛 등으로 품질을 차별화함으로써 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해마다 8월이면 ‘안지랑곱창골목 축제’가 열려 여러 집의 곱창을 시식할 수 있다. 500m 남짓 되는 거리 양쪽으로 곱창집들이 즐비한 풍경은 안지랑곱창골목을 다시 찾게 만드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막창의 고장답게 막창만을 파는 골목이 여러 곳 있다. 경북대학교 북문 쪽 복현동 막창골목과 서부터미널 막창골목, 수성구 들안길의 막창골목 등이 대표적이다. 막창은 본래 곰탕의 국물맛을 내는 식재료 정도로만 사용되다가 구이로 각광받게 되는데, 그 원조격인 식당도 대명동에서 시작되었다. 1969년 옛 미도극장 근처 황금막창에서 메뉴로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대중화되었다.
[앞산카페거리]
대구는 한국전쟁 이후로 커피 문화가 유독 발달하여 커피의 성지라고도 불린다. 커피명가라는 브랜드가 탄생한 도시이기도 하고 진골목의 미도다방처럼 연륜 있는 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도 있다. 6·25전쟁 당시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대구에는 피난 온 예술가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였고, 예술작품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자연스레 커피가 등장하였다. 전쟁을 취재하던 외신 기자는 대구의 이 같은 풍경을 보고 「폐허에서 바흐가 들린다」는 기사를 쓰기도 하였다. 당시 다방이 단순히 커피 판매뿐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이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대명9동 일대에는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정원을 낀 저택들이 하나 둘씩 커피전문점으로 변모하면서 자연스레 커피거리가 형성되었다. 45곳 정도의 카페는 대명남로와 현충로가 만나는 남명삼거리에 주로 몰려 있다. 앞산으로 가는 차량들은 600m 가량 늘어선 카페들을 구경할 수 있다.
각각의 집들은 고유한 형태만큼이나 이색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가령 갤러리 형태의 카페가 있는가 하면 2층 양옥집을 리모델링하여 가정식 레스토랑으로 문을 연 곳도 있다. 앞산의 자연경관이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벚꽃 만발한 봄부터 낙엽 가득한 가을까지 카페거리의 발길을 줄어들지 않는다. 카페마다 넉넉한 주차공간이 있고, 커다란 통유리가 있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프랜차이즈 커피점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특색 있는 카페까지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인근에 있는 앞산맛둘레길에서 외식을 한 가족 단위의 손님들과 드라이브에 나선 연인들이 주요 고객층이며 매장마다 특징이 있어 일정 수 이상의 단골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카페거리가 인기를 끌자 일부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올리기 시작한 탓에 개인 카페들이 문을 닫는 일도 발생하였다. 앞산카페거리의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는 적신호가 켜진 셈이어서 대구광역시 남구청은 앞산카페거리번영회와 함께 임대료 안정에 관한 내용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앞산카페거리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하여 앞산카페거리 입구에 카페거리를 대표하는 입간판을 세웠으며, 다양한 경관조형물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