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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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大明洞 王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시대 | 고려/고려 전기,현대/현대 |
집필자 | 구본욱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927년 -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대덕산 은적사 왕굴에 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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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대구 대명동 왕굴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성격 | 굴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굴.
[개설]
대구 대명동 왕굴(大邱大明洞王窟)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다.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927년 팔공산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왕건에게 전세가 불리하였다. 이때 신숭겸(申崇謙) 장군 등은 왕건이 미복(微服)으로 탈출하도록 하였다. 전투는 대패하였고 신숭겸 등은 지묘동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전사하였다. 왕건은 탈출하여 대덕산 은적사(隱寂寺) 근처의 굴에 숨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가 추격하여 대덕산에 이르자 갑자기 운해가 끼어 왕건이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왕굴’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위치]
대구 대명동 왕굴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다. 근처에 은적사가 있다.
[형태]
대구 대명동 왕굴은 작은 굴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지역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다양한 형태로 구전되고 있다. 왕굴 관련 설화에서는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고려를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왕건과 관련된 설화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도 널리 회자(膾炙)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구전되고 있다. 대구는 임진왜란을 비롯한 6·25전쟁 때에도 팔공산과 더불어 국난 극복의 중심에 있었던 도시이다. 왕건의 설화는 대구인의 긍지와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