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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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是聲 |
영어공식명칭 | Kim Sisung |
이칭/별칭 | 문원(聞遠),금포(錦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602년 4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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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김시성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김시성 충청수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6년 - 김시성 경상병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3년 - 김시성 삼도수군통제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676년 9월 22일![]() |
출생지 | 남하리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 |
거주|이주지 | 남하리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 |
수학지 | 영모당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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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삼도수군통제영 - 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문화동 62] |
묘소|단소 | 김시성 신도비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 |
사당|배향지 | 남호서당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남하새마을길5길 59-13[남하리 535-1] |
성격 | 무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청도(靑道) |
대표 관직 | 삼도수군통제사 |
조선 후기 대구에서 수학한 무관.
김시성(金是聲)[1602~1676]의 본관은 청도(靑道)이며,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응수(應洙)이고, 할아버지는 김영(金瑩)이다. 아버지는 김사행(金四行)이고,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아들은 김우진(宇振)·김하진(河振)·김해진(海振)이다.
김시성은 1602년(선조 35) 4월 24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팔장사(八壯士)의 우두머리로 뽑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호종하여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귀국한 뒤에는 1646년 황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용천부사로 부임하였다. 용천부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해치는 호랑이를 활로 쏘아 죽여 칭송을 들었다.
김시성은 1648년 충청수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강계부사·함경도병사·어영중군을 역임하였다. 강계부사로 재임 시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사당을 수리하고 학전(學田)을 더 마련하기도 하였다. 내직으로 들어가 포도대장을 역임한 뒤 1656년(효종 7) 경상병사가 되었고, 1663년(현종 4)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노량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비석을 세우고 조정에 충렬사(忠烈祠)의 편액을 청하여 하사받았다. 1676년(숙종 2) 9월 22일 사망하였다.
김시성의 저술로는 『금포실기(錦浦實紀)』가 있다.
김시성의 신도비가 경상북도 하양읍 남하리에 있다. 신도비명은 대사헌 권해(權瑎)가 지었다.
김시성은 1786년(정조 10) 남호사(南湖祠)에 배향되었다. 남호사는 1855년(철종 6)에 남호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68년(고종 5) 서원폐령으로 훼철된 후 1928년에 남호서당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남호서당은 하양읍 남하리 535-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