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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39
한자 八里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팔거리현에서 팔리현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776년연표보기 - 팔리현에서 팔거리현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940년연표보기 - 팔거리현에서 팔거현으로 개칭
성격 행정구역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일부에 있었던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개설]

팔리현(八里縣)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일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지천면, 동명면을 관할한 757년(신라 경덕왕 16) 이후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양주(良州) 수창군(壽昌郡) 조에 팔리현(八里縣)은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북치장리(北耻長里)라고도 하고 인리(仁里)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고려 때]의 팔거현(八居縣)이라고 되어 있다.

[명칭 유래]

757년에 지명을 중국식[漢式]으로 개정할 때 팔거리현팔리현으로 고쳤다. 776년(혜공왕 12)에 지명을 예전의 것으로 되돌렸는데, 대체로 신라 말까지 신구의 2개 지명이 병용된 듯하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팔거현으로 개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팔리현은 신라 통일기 주(州)-군(郡)-현(縣) 체제에서 양주(良州)[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수창군(壽昌郡)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체로 조선 후기의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에 해당한다.

치소(治所)는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혹은 구암동으로 추정된다. 읍내동은 고려시대 이후 팔거현의 중심지였으며, 읍내동 491유적[현재 칠곡e편한세상아파트]에서는 통일신라 주거지, 고려~조선시대의 대형 건물지를 포함한 다양한 생활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한편 구암동 일대는 삼국시대 팔거리현의 중심지로 추정되는데, 구암동 병영지 유적에서는 통일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환호(環濠)와 목책(木柵)으로 구획된 수혈(竪穴)과 고상식(高床式) 건물지군이 확인되었다.

[자연환경]

동명면에서 발원한 팔거천이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琴湖江)으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에 함지산[287.7m]이 있으며 함지산(函芝山)팔거산성(八莒山城)이 있다. 북쪽에는 팔공산(八公山)에서 이어진 가산(架山)[901.7m]이 있는데, 임진왜란 후에 가산성이 축조된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가 가산 옆 소야고개를 넘어 팔거천을 따라 대구로 이어졌다.

[현황]

팔리현은 관할 구역상 조선 후기 칠곡도호부의 영역이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 국우동, 도남동, 관음동, 동천동, 읍내동, 학정동, 동호동, 태전동, 매천동, 팔달동, 금호동, 사수동,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지천면, 동명면에 해당한다. 중심지는 1819년(순조 19)에 칠곡부의 치소가 된 ‘구읍(舊邑)의 팔거창(八莒倉)’, 즉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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