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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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家廟移安文 |
영어공식명칭 | Gamyo yianmoon |
이칭/별칭 | 「가묘를 옮겨 봉안하는 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가묘이안문」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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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가묘이안문」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 간행 |
배경 지역 | 「가묘이안문」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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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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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성격 | 축문|봉안문 |
작가 | 정구 |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한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거주지를 옮기고 가묘를 이안하면서 지은 봉안문.
「가묘이안문(家廟移安文)」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이고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의 연경서원(硏經書院)과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2001년 발행한 『국역 한강집』에서는 「가묘이안문」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가묘를 옮겨 봉안하는 글」이라고 표기하였다.
「가묘이안문」은 신주를 옮겨 모시는 사정과 과정을 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묘이안문」의 전문 내용이다.
“노곡(蘆谷)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겨우 2년이 지났는데, 갑작스레 화재를 만나서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 매우 심하였고, 또 우물마저 바짝 마르고 가을바람이 매서워 계속 살기가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을 옮길 것을 계획하여 사수(泗水) 북쪽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초가집이 이미 완성되었고, 초가로 된 사당 또한 이루었습니다. 이에 신주를 받들고 감히 이안(移安)할 것을 청합니다. 삼가 술과 과일을 갖추어 삼가 고하는 의식을 올립니다. 삼가 고합니다.[卜居蘆谷, 纔經二載, 奄遭火災, 慘酷已甚, 且緣井泉渴涸, 西風勁冷, 不安仍寓. 遂謀重遷, 爰得泗水之陽. 茅棟已成, 草祠亦就. 玆奉神主, 敢請移安. 謹具酒果, 用伸虔告謹告.]”
「가묘이안문」은 4언과 6언으로 이루어져, 일의 사정을 상세히 드러내었다.
「가묘이안문」은 여타의 서원 봉안문과 차별되는 내용과 양식이 보인다. 가묘의 이안(移安)이기 때문에 서원의 봉안문보다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자율적인 성격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