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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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窟- 由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석배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 「왕굴의 유래」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Ⅱ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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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왕굴의 유래」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 |
관련 지명 | 왕굴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왕건|견훤|가야 왕 |
모티프 유형 | 지명 유래담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비슬산에 있는 왕굴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왕굴의 유래」는 대구광역시 남구 비슬산(琵瑟山)에 있는 왕굴(王窟)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지명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왕굴의 유래」는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와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비슬산에 있는 왕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이 후백제 견훤(甄萱)[867~936]과의 팔공산(八公山) 전투에서 대패하고 비슬산으로 피난하였다. 왕건은 은적사(隱寂寺)에서 3일 동안 숨어 있다가 어느 굴에 피신하여 쉬어 가기로 하였다. 때마침 견훤 부대가 근처까지 와서 왕건을 찾으려고 하자, 갑자기 운해(雲海)가 가득하고 왕거미가 나타나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서 왕건이 들키지 않았다. 이후 왕이 피신한 굴이라 하여 왕건이 쉬어 간 굴을 ‘왕굴’이라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1,055년 전 가야에 난(亂)이 일어났을 때 가야 왕이 큰골로 피신하여 안일사(安逸寺)에 있다가 3일 동안 왕굴에서 피신하였다고 전한다. 가야 왕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금솥을 그곳에 묻어 놓았는데, 나중에 일본인들이 금솥만 가지고 가서 뚜껑은 아직도 왕굴 주위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왕굴의 유래」는 지명 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