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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천도 시도는 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15
한자 達句伐 遷都 試圖-大邱-影響-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박성현

[정의]

신라시대 대구 지역과 신라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시도.

[신라는 왜 천도를 시도하였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신문왕 9년[689] 조에 도읍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未果]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달구벌『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달구화현(達句火縣)을 말하며, 경덕왕 때 대구현(大丘縣)으로 고쳐진 현재의 대구 지역을 뜻한다. 기존에는 달구벌 천도 계획에 대하여 주로 중앙 정치사의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즉, 신라 중대(中代)[654~780]의 전제(專制) 왕권이 진골(眞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달구벌 천도를 시도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현재의 경주에 해당하는 기존의 왕도(王都)는 한반도 통일 국가의 수도로서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통일 후 각종 국가 체제를 정비한 신문왕이 천도를 시도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가지는 기존의 왕도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하였던 도성(都城) 양식, 즉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의 양식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안성은 수나라 대흥성(大興城)에서 비롯되었으며, 북쪽 중앙에 위치한 황성(皇城) 동서와 그 남쪽으로 도성민들의 거주 구역이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며, 나성(羅城), 즉 외곽(外郭)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쿄[藤原京], 헤이조쿄[平城京], 헤이안쿄[平安京] 등이 조영되었고, 신흥국 발해의 상경(上京) 역시 규모는 다르지만 그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도는 궁성(宮城)인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취락에서 발달한 전통적인 도시였다. 진흥왕대[540~576]에 이르러 수·당 이전 중국 도성의 영향을 받아 월성 동쪽 현재의 황룡사지 일원에 새로운 궁궐과 격자형 시가지를 조영하였지만, 궁궐을 옮기지 못하고 황룡사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 왕도는 구시가와 신시가가 결합된 형태가 되었으며, 도시가 북쪽으로 발달하면서 기존의 묘역이 도시 가운데 위치하게 되고 궁궐은 남쪽에 치우쳐 도시를 등지게 되었다. 9주(州) 5소경(小京)을 완비하고 지방의 군현제(郡縣制)를 정비한 신문왕은 무엇보다 통일신라의 왕도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재정립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왜 대구였을까? -물류상의 이점]

신라 왕도는 예전부터 영역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수도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고대 국가의 수도는 결국 주변 지역의 산물을 끌어들여 소비하는 곳이었다. 영역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 외에도 경주 지역이 갖는 물류상의 어려움 때문에 단순히 도성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천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구가 천도지로 선정된 것은 여전히 영역의 중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물류상의 이점이 상당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방의 산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곡물인데 곡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수운(水運)이나 수레를 이용하여야 한다. 경주는 동해안에 가까운 형산강 유역에 있어 삼국시대 영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낙동강 유역과 수운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왕도가 도시로 발전하면서 지방의 물자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체계가 고려되었을 것인데, 아마도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경주에서 가까운 금호강 상류 쪽으로 최대한 가지고 와서 수레를 이용하여 왕도까지 운반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대구로 수도를 옮기게 되면 낙동강 유역의 물자를 좀 더 쉽게 수도로 가져올 수 있게 된다.

한편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다시 소백산맥 바깥 지역의 물자를 가지고 오는 문제가 대두하였을 것인데, 이때 신라는 고려나 조선처럼 연안 해로를 이용하기보다는 산맥 너머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소비 수요를 분산하고 일부를 육로로 운송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이 천도지를 물색하였을 때 아마도 한강 유역까지는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류뿐만 아니라 방어적인 측면도 고려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당전쟁이 종결되었다고는 하지만 당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다. 소백산맥 너머에 남원경(南原京)[현 남원], 서원경(西原京)[현 청주], 중원경(中原京)[현 충주], 북원경(北原京)[현 원주]을 설치하고, 경주에서 멀지 않으면서 물류가 편리한 곳으로 천도를 결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달구벌, 즉 현재의 대구 지역은 범람의 위험에서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수운을 활용할 수 있고, 장안성과 같은 도성을 조영할 만한 넓은 평지를 갖춘 곳이었다.

[천도 계획은 어느 정도 시행되었고, 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천도 계획은 얼마나 실행되었을까? 만약 어느 정도 시행된 상태에서 중단되었다면, 부지의 선정과 구획 및 조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시내 주변에서 격자형 계획도시가 입지할 만한 곳은 대체로 신천(新川) 좌우의 평지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중대 왕도의 크기는 길이 3,075보, 너비 3,018보로 가로·세로가 각각 5㎞ 정도 되었다. 최소 이 정도의 면적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남북으로 앞산 아래에서 달성토성 북쪽까지, 동서로는 두류산에서 범어공원 정도까지 도시로 개발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신라 왕도 외에 9주의 치소(治所)와 5소경이 설치된 지방 도시에도 고대 도시계획의 흔적이 남아 있다. 9주 중 상주(尙州)의 치소였던 상주와 남원경이 설치되었던 남원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대구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실제 구획과 부지 조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지도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범위 안에서는 신천 동쪽의 수성구 지역이 비교적 넓은 평지로 되어 있고 또 잘 구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의 구획은 현대의 도시계획에 따른 것이고 과거의 모습은 일제시대 지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에 수정된 대구 지역 1:25,000 지형도를 보면 현재의 수성구, 즉 수성면은 대체로 논으로 되어 있으면서 북쪽에서부터 하동[현 수성동], 중동, 상동의 중심 취락이 있고, 남북 방향의 도로가 2~3개 평행하게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정밀하게 보기 위하여는 토지조사사업 때 작성한 지적원도(地籍原圖)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마을과 도로의 상태는 큰 차이가 없다. 이 가운데 평행한 남북 도로는 격자형 토지 구획의 일부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분포 범위가 좁고 동서 방향 도로가 현저하지 않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토지 구획과 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심을 살짝 바꾸어 보았을 때 수성구 수성동, 중동, 상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수현내면(守縣內面), 즉 수성현(壽城縣)의 현내를 구성하는 곳이었다. 즉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대구도호부의 속현(屬縣)인 수성현, 고려시대 수성군(壽城郡), 통일신라시대 수창군(壽昌郡)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직선화된 도로와 밀집된 취락은 신라 수창군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수창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취락이 확인되었으며, 최근에는 관아지로 볼 수 있는 건물의 기단도 확인된 바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지방 제도, 더 나아가 지방 사회 구조를 파악할 수 있지만, 각 군현의 중심지, 즉 치소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었다. 9주의 치소와 5소경의 경우에는 왕도와 같이 격자형 도시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요즈음으로 치면 수도권에 해당하는 수창군의 군치 역시 도시까지는 아니지만 읍(邑)[town] 정도 규모와 형태로 정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구벌 천도 시도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통일신라시대 대구 지역의 군현 구조는 수창군대구현, 팔리현(八里縣)[현 북구 읍내동], 하빈현(河濱縣)[현 달성군 다사읍·하빈면], 화원현(花園縣)[현 달성군 화원읍]을 거느리고 있는 형태였다. 그렇지만 삼국시대 대구 지역의 중심지는 수창군이 아니라 대구현, 즉 달구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 지역 중심지의 경관은 토성과 고총 고분군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달구벌에 위치한 달성토성과 인근의 달성고분군이 가장 우월한 유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창군의 본명은 위화군(喟火郡) 혹은 상촌창군(上村昌郡)인데, 풀이하면 ‘윗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위화의 대응 고분군은 분명하지 않지만 대명동고분군달성고분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달성고분군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위화가 군치로 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위화에서 풍부한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대구 지역에 설치된 군(郡)의 중심지가 달구벌에서 위화로 변경된 것은 달구벌과 위화의 경쟁 구도에서 중앙 정부가 위화의 손을 들어 준 것이라기보다는 국가 차원의 공간 구조 개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주치와 소경이 일종의 지방 도시였다면, 군치 역시 그보다는 작지만 평지에 새로운 공간으로 조영되었다는 것이다. 달구벌 천도 시도가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달구벌 천도 시도가 계기가 되어 달구벌 대신에 위화의 평지에 새로운 군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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