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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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統領- 都市, 大邱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주요 활동을 남긴 대한민국 대통령들.
[개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상당수가 대구에서 삶의 변혁기 또는 정치적 전환기를 맞았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은 특히 대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대구에서 위기를 맞이한 이승만]
이승만이 처음 대구와 관련을 맺은 것은 6·25전쟁 때였다. 이승만과 정부는 6·25가 대규모의 전면 남침인지 그간의 소규모 휴전선 충돌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하였다. 결국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을 내세워 남침하였음을 깨닫고 이승만은 피신을 선택하였다. 이승만은 다급히 경무대를 빠져나와 새벽 3시 무렵 서울역에서 부산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전 11시 40분에 열차가 안전한 후방인 대구에 도착하였을 때 이승만은 열차를 멈추게 하였다. 서울로부터의 정보를 취합하기 위해서였다. 피신을 위하여 대구까지 내려왔던 이승만은 측근들의 권유로 다시 서울 쪽으로 되돌아가다 대전까지 올라갔다. 오후 4시 30분께 이승만을 태운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였다. 이미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 관료들이 상당수 있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치러진 1956년 3대 대선 때 이승만은 대구로 인하여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였다. 전국적으로 이승만은 70%, 조봉암은 30%를 얻어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대구의 득표율은 정반대였다. 조봉암이 72.3%, 이승만은 27.7%를 득표하였다. 이승만이 다음번 대선인 1960년에 대구를 특히 신경 쓴 이유이다. 드디어 1960년 4대 대선이 열리는 해가 되자 대구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대구역 광장에서 장면(張勉)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던 2월 28일, 대구의 각급학교에서 뜬금없는 등교를 명하자 정치적 노림수가 있음을 알아챈 고등학생들이 먼저 저항의 움직임을 보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2·28 대구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4·19혁명은 대구의 민주화운동이 도화선이 되었다. 2·28 대구민주화운동으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3·15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었고, 이런 움직임이 4·19혁명을 낳아 이승만은 결국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대구 곳곳의 박정희 흔적]
박정희는 1932년부터 1937년까지 5년 동안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있던 대구사범학교를 다녔다. 박정희는 심상과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에는 검도·사격·교련·나팔·육상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나팔 부는 것과 교련을 가장 좋아하였다고 한다. 학비가 면제되는 대신 의무적으로 교사 생활을 해야 하였던 대구사범학교는 가난한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구미보통학교 개교 이래 첫 번째 합격생이었던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생활을 통하여 군사적 교율과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익혔다. 대구사범학교는 일제가 황국신민 사상을 지닌 보통학교 훈도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관립 학교이며, 교사 사관학교라고 할 만큼 규율과 학칙이 엄하였다.
박정희는 입학시험에서 100명 가운데 5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은 하위권에서 최하위권으로 내려갔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걱정이 많았으며 기숙사비가 없어 고향에 내려가 있는 날들로 인하여 장기 결석도 많았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시절을 기억하는 동기들은 학창 시절 박정희가 말이 없고 웃음이 없었으며 군악대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된 모습, 축구를 잘한 모습 등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박정희가 다녔던 대구사범학교의 본관 건물은 1923년 건립되었고, 강당 건물은 1925년 건립되었다. 본관 건물은 1972년 화재로 벽돌 구조 부분만 남았으나,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부설 중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사적 가치가 높아 국가등록문화재[2002년 2월 28일]로 지정되었다. 옛 대구사범 본관은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관 한쪽 벽면은 ‘심상과의 자랑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20여 종의 서적과 여러 흔적을 관람할 수 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이후 문경보통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한다. 그러다 중국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해방 이후 군 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육군본부가 대구에 세워지자 오랜만에 대구를 찾게 된다. 대구 중구 동인동에 있던 육군본부의 중요 정보참모로 근무하던 박정희 중령은 대구 계산성당에서 옥천 처녀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1950년 12월 12일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은 허억 대구시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이 각각 중성적인 것에 대한 오해로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펼쳐지기도 하였다는 후문이 전한다. 1952년 2월 2일에는 중구 삼덕동 신혼집에서 첫딸 근혜를 얻었다.
박정희에게 학창 시절과 신혼 시기를 보낸 대구는 각별한 도시였으며 고향인 구미와도 가까워 더욱 친근함을 가졌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순시차 대구에 오면 보안이 편리한 수성관광호텔에 곧잘 머물렀다. 또한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이 창립하자 창립을 축하하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은행의 적금에 제1호로 가입하였다. 정기예금 입금전표의 입금액은 10만 원으로 나와 있다. 현재 대구은행 금융박물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예금전표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구의 달성공원이 1969년 8월 개원하자 이듬해인 1970년 5월 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이들을 위하여 꽃사슴 다섯 마리를 기증하였다. 그리고 한글로 쓴 ‘시민의 문’이라는 휘호를 받아서 새긴 현판을 공원 정문에 걸었다.
[대구에서 교사를 꿈꾸던 최규하]
패전 후 일본에서 조선 문제에 대하여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여 온 작가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71]가 1957년 발표한 단편소설 「일본인 중학교(日本人中學校)」는 최규하와 대구공립중학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인 중학교」에서 고바야시 마사루는 1940년대 대구에서 보낸 자신의 중학교 시절의 한 일화를 소설화하였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영어 교사가 사실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일본인 학생들이 영어 교사의 민족성을 모욕하고 결국 학교에서 쫓아내고 만다. 고바야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식민자 2세의 식민주의적 정신 구조를 생생하게 그렸다. 소설 속의 신임 영어 교사가 실은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최규하였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일본인 중학교」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우메하라 겐타’라는 이름을 가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신임 영어 선생님으로 나온다. 세련된 외모와 온화한 인품을 지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인상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 ‘조선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학생들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지고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우메하라 겐타는 일본인 중학교를 사직하고 만주로 가 버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고바야시 마사루는 소설의 소재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남구 이천동에 있는 지금의 대구중학교는 해방 전에는 일본인 중학교였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인보다 더 일본어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어학 실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이다 보니, 조선총독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일본인 학교 교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 도쿄고등사범학교 출신자는 식민지 조선의 중학교 교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최규하도 학벌의 은혜를 입어 즉시 대구중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고학 끝에 겨우 손에 넣은 교직인 것이다.
소설은 차가운 비가 내리는 5월의 어느 날, 젊은 신임 영어 교사가 나타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강당에서 교사의 자기소개를 들은 주인공인 중학교 3학년 소년 고로[五郞]는, 순식간에 흩어진 회색 구름 사이로 한 조각의 창공을 엿본 듯한 인상을 받는다.
“남자는 선명한 색의 푸른 양복을 입고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키는 아마 5척 8촌[약 175.7㎝] 정도였다. 그는 로이드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테는 검은색이 아닌 연지색이었다. 머리카락은 젊음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새카맣고 윤이 났다.” “나는, 올봄에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우메하라 겐타입니다…….”
“우메하라 선생님은……조선인이라고 하는 말이 있던데……이 말을 들었을 때, 고로는 차가운 쇠주먹이 그의 여린 심장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가까스로 되물었다. -누가 말하였어, 그런 잔인한 말…….”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어떤 일본인보다도 일본인답게 보였던 우메하라 겐타가 실은 조선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학생들 사이에서 실망이나 분노, 혹은 광희(狂喜)라고도 하기 힘든 이상한 흥분이 폭발한다. 한때는 우메하라 겐타에게 동경을 품고 있었으나, 소문이 퍼지자마자 삽시간에 식민자로 변모하여 버리는 주인공 고로 역시 그러한 흥분 속에 있었다. 우메하라 겐타의 ‘정체’를 알게 된 일본인 학생들의 지배자 의식은 단숨에 분출되었다. 다음 날 영어 시간이 시작되기 전, 교실은 이상한 활기에 둘러싸인다. 누군가가 힘껏 창문의 커튼을 잡아 찢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밖에서 깨진 오지그릇과 밥공기를 가져와 교탁을 장식하였다. 잔인한 열기로 가득 차 있는 조용함이 흐르는 교실에 경쾌한 발걸음으로 우메하라 겐타가 들어오지만 곧바로 교실의 이변을 알아차리고는 안색은 변하였다. 얼굴은 파랬다. 입술에도 혈기가 없었다. 눈은 정신 나간 것처럼 크게 떠져 있었고, 양손은 축 늘어뜨린 그대로였다. 가까스로 낮고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였니…….”
최규하가 대구중학교 교직 생활을 버리고 만주로 떠난 것은 개인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대구중학교 사직 후 만주로 건너간 최규하는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들어가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해방 후 외교가를 올곧게 걸어온 직업공무원으로서 권력 지향과는 무관하였던 최규하가 가장 재임 기간이 짧았지만 대통령직까지 수행한 것을 보면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체험한 인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대구공고를 휩쓴 전두환]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의 전두환은 5세 때인 1935년에 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전두환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과 관련하여서 대구공고에서의 일화가 많다. 어릴 때부터 다리 힘이 좋아 운동과 싸움을 잘하였던 전두환은 대구공고에서 축구부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강인한 체력에다 넉살이 좋은 편이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1951년에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는다.
[대구 동구에서 태어난 노태우]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가 있다.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대구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났으며,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장남으로 자라났다. 노태우는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숙부가 아버지 이상으로 노태우 일가를 잘 돌보았다고 한다. 1939년 3월, 집 근처에서 6㎞ 떨어진 대구공산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형편이 넉넉지 않아 맨발로 걸어서 통학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45년 대구공산소학교를 마치고 대구공립공업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생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구공업고등학교 동문인데 전두환은 24회 기계과이고 노태우는 22회 전기과이다. 다만, 노태우는 학업 도중에 경북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경북고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대구 중구에서 태어난 박근혜]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중구 삼덕동1가 5-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는 1950년 12월 신혼집을 꾸민 곳에서 2년 만에 첫 딸 박근혜를 얻었다. 1953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박근혜가 삼덕동에 머문 기간은 짧지만 대구 중구는 엄연히 박근혜가 태어난 고향이다.
박정희도 대구 중구와 인연을 맺고 있다. 박정희는 1932년 중구 대봉동에 있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에 거주하며 교사의 꿈을 키워 갔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과 함께 문경공립보통학교로 부임하면서 대구를 떠났던 박정희가 다시 대구로 돌아온 것은 1950년 6월 6·25전쟁 도중이었다. 박정희는 중구 동인동 육군본부[현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소령으로 근무하며 본부 내 장교 숙소에서 거주하였다. 육영수 여사를 만난 것도 1950년 10월 대구에서였다. 하지만 곧 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육영수를 대구에 남겨 두고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야 하였다. 3개월 후 중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삼덕동 한옥에 세를 얻어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박근혜의 생가는 세 칸짜리 방이었는데, 1칸은 아버지, 1칸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그리고 남은 1칸은 운전병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는 강릉과 대구를 오가며 2년간 신혼생활을 이어 갔다. 1952년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대령]으로 대구로 부임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딸 박근혜를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1953년 서울 신당동 집으로 이사하였다. 박근혜의 생가 주변은 재개발과 함께 대구 도심의 번화가인 동성로로 발전하였다. 지금은 생가 부지에 신축 건물이 들어서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