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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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浦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박성현 |
[정의]
신라 말 고려 초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편입된 고산 지역에 있었던 성.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경산현 고적 조에 금성(金城), 우곡성(于谷城)과 함께 나타나 있다. 세주(細註)에 인용된 『주관육익(周官六翼)』에는 신라 때 금성, 우곡성, 고포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고 통합한 뒤 고쳐서 세 성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대체로 신라 말에 압량군, 즉 장산군(獐山郡)이 3개 성으로 분립하였다가 다시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산현 고적 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고포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170척[포백척(布帛尺) 약 46㎝를 적용하였을 때 약 1,458m]인데, 조선 초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고포성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산현 서쪽 9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거리 측정의 기준이 된 조선 시대 경산현의 치소는 현 경산 시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경상북도 경산시 삼북동 222번지에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포성이 북쪽 9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 곧 고포성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산은 경산현 북쪽 8리에 있다고 되어 있어 고포성과 구별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는 욱수동산성을 고포성이라고 칭한다고 하였으나, 방향과 거리로 보아 우곡성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곡성과는 다른 방향에서 고포성의 위치를 찾는 것이 타당하겠는데, 당시 경산 영역에서 북쪽 8리로 표시된 성산[성동토성]과 서쪽 6리로 표시된 우곡성[욱수동산성] 서쪽에 다른 알려진 성지는 없다. 다만 거리로 보았을 때 시지동 방면, 혹은 ‘포(浦)’라는 지명을 보았을 때 금호강 변의 가천동 혹은 고모동 방면에 고포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