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79 |
---|---|
한자 | 南鮮物産-籠城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발단 시기/일시 | 1990년 4월 26일 - 남선물산굴뚝농성사건 민주노조 사수, 임금인상 요구 쟁의 결의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90년 7월 4일 - 남선물산굴뚝농성사건 시작 |
종결 시기/일시 | 1990년 8월 31일 - 남선물산굴뚝농성사건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남선물산 대구공장 -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 |
종결 장소 | 남선물산 대구공장 -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 |
성격 | 노동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이정림|채한수|이성해|신명숙|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염색공단 임금인상공동대책위원회 |
[정의]
1990년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에 있었던 남선물산 대구공장에서 민주노조 사수를 위하여 농성한 노동운동.
[역사적 배경]
남선물산은 1967년에 설립된 이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섬유 이외에도 13개 업종 9개 업체를 계열로 거느렸던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섬유업체였다. 그러나 1984년에 부도가 난 후로는 법정관리 상태에 있었다. 당시 회사의 재정 상태는 부채 비율은 300%에 달하였으나 당기순이익은 22억 원에 달하는 흑자였다. 그러나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나 작업 조건은 대구 제직업체 평균치보다 못한 편이었다. 남선물산 노동자들은 1989년 장기 파업, 업무 조사 거부 투쟁을 전개하면서 남선물산노조를 대구 지역 투쟁의 중심으로 세웠다.
[경과]
1990년 4월 26일 남선물산 노동자들은 92.3%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하며 임금인상 투쟁을 결의하였다. 사측은 곧바로 철야농성장에 농성 해산을 위한 인력을 투입하였다. 1990년 5월 21일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사측은 직장폐쇄, 단전단수, 기숙사 폐쇄, 노조 간부 21명에 대한 고소 고발로 대응하였으며 지도부 구속과 파업 대오 해산을 위하여 경찰 병력을 다섯 차례에 걸쳐 투입하였다. 노동조합은 서울 본사 상경 투쟁, 경찰서 항의 투쟁, 전국 민주노조 순회 투쟁 설명회 등을 벌이며 맞섰다.
1990년 7월 4일 80m 높이의 굴뚝으로 올라간 노조 지도부 4명은 임금인상, 파업 기간 중 임금 지급, 구속 노동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회사 측은 장기 파업에 지쳐 가는 노동자들을 “선조업하면 임금 두 자릿수 인상”으로 회유하였지만 조합원들은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파업 100일을 넘긴 1990년 8월 30일 임시총회를 앞두고 농성에 참여하지 않던 조합원들이 선조업 주장에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8월 31일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고 굴뚝 농성을 벌이던 지도부를 모두 연행하였다. 지도부 연행에 항의하던 여성 조합원이 2층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였다.
[결과]
남선물산굴뚝농성사건은 서울 본사 투쟁으로 구속되었던 부위원장이 석방되어 직무대행을 맡아서 1990년 9월 7일 총회에서 파업을 철회하였다. 정상가동과 함께 교섭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90년 9월 9일 대구노련 주최 ‘남선물산 파업투쟁 보고대회’를 끝으로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선물산굴뚝농성사건은 단위노조 차원에서 전국노동자협의회와 민주노조 사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장기간 투쟁한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운동 사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