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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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多勿團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정의]
일제 강점기 중국 베이징에서 대구 등 영남 출신 인물들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개설]
다물단(多勿團)은 친일파와 친일 밀정 처단, 독립군 자금 모금, 친일파 처단 선언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단원 대부분이 대구를 비롯한 영남 출신이었고 결성 초기에는 40명~50명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다물단의 ‘다물(多勿)’은 고려 말로 ‘옛땅을 찾는다’는 뜻으로 용감, 전진, 쾌단 등의 뜻과 함께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다물단의 강령은 자수(自修), 자양(自養), 자작(自作), 자급(自給)이었다.
[설립 목적]
다물단은 무장투쟁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우고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으로 항일투쟁을 감행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변천]
다물단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회영(李會榮)[1867~1932]의 장남 이규학, 이회영의 둘째 형인 이석영(李石榮)[1855~1934]의 아들 이규준(李圭駿), 이성춘(李成春) 등이 의열단의 유자명(柳子明)과 상의하여 1923년 베이징에서 결성하였다.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하고 조직 결성을 지도한 인물은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였다. 1923년 결성된 다물단은 대구 출신 배천택(裵天澤), 경상북도 성주 출신 김창숙(金昌淑), 경상북도 고령 출신 남형우(南亨祐) 등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23년 3월 조직한 국민당(國民黨)과 연합하여 1925년 4월 베이징 마쓰먀오[麻四廟]에서 확대 개편되었다. 중심 인물로 배천택과 김창숙 외에 경상남도 동래 출신의 한진산(韓震山),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유청우(柳靑宇)[본명 柳佑國],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서왈보(徐曰甫), 강원도 강릉 출신의 김세준(金世俊), 대구 출신의 서동일(徐東日) 등이 참여하였다. 창단 당시 단장은 황해관이었고, 결성 초기 단원은 50명 내외였으나 1926년 2월에는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까지 활동하다가 점차 쇠퇴하여 1928~1929년경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다물단의 주요 활동은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이간하는 일제 밀정 등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일과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에 친일파 처단 선언문인 ‘악분자(惡分子) 소탕 선언’ 등을 배포하는 일이었다. 다수의 영남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였던 다물단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1925년 4월 다물단 단원 황익수(黃益洙), 이호영(李晧榮) 등이 의열단원 유자명 등과 함께 베이징에 머물던 일제 고급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였다. 서동일은 1924년 1월~1924년 2월에 걸쳐 경상북도 경산과 청도 일대에서 1,400여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이후 서동일은 남형우에게 다물단의 군자금 모집 특파원 신임장과 군자금 모집 선언서, 다액 제공자 표창 기장(記章) 등을 받아서 지니고 국내에 들어와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었다. 서동일이 체포된 뒤 윤영섭(尹瑛燮), 윤병래(尹炳來), 윤병일(尹炳馹), 최성희(崔聖熙), 이종호(李鍾昊) 등도 함께 붙잡혀 다물단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28년 5월 중국 지린[吉林]에서 열린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에 ‘재만(在滿)운동단체협의회’의 일원으로 다물단 단원 이청우(李靑雨), 이동림(李東林)이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1920년대 중후반까지 활동하다가 점차 쇠퇴하여 1928년~1929년경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다물단은 배천택, 서동일, 김창숙 등 대구를 비롯한 영남 출신 인사들이 중국 베이징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함으로써 독립운동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