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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00
한자 對日屈辱外交反對汎國民鬪爭委員會 慶北道支部
이칭/별칭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지부,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4년 3월 15일연표보기 -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4년 3월 30일 -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 ‘굴욕 외교 성토대회’ 개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5년 4월 1일 -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 강연회 개최
성격 사회조직

[정의]

1964년 대구광역시에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

[개설]

1964년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하여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쳐 온 박정희 정부는 1964년 3월 한일회담의 타결, 조인, 비준을 5월까지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관한 문제를 한일회담의 부차적인 내용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다.

1964년 3월 민중당 등 야당은 ‘한일 저자세 외교 반대 범국민 투위’를 결성하였고, 사회 각계 인사 200여 명도 1964년 3월 6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구국 선언’을 발표하여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대구·경상북도 지역에도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북도지부[약칭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가 결성되었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의장과 상임위원회로 구성하고, 의장에 장현모(蔣顯模)를 선출하였다.

[설립 목적]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고 규탄하기 위하여 1964년 3월 15일 대구YMCA에서 결성되었다. 결성 당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한일 문제에 대한 기본 방침, 대정부 경고문, 구국 선언문 등을 채택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한일회담반대운동은 1964년 3월 24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구 지역에서도 1964년 3월 25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경북대학교를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등 1,000여 명의 대학생이 대구 중앙로를 비롯한 중심가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라고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964년 3월 26일에도 청구대학 1,000여 명의 대학생들은 동구 신암동에 있던 청구대학 본관에서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계명대학교 학생들은 공화당 경북도지부 조직부장과 민정당의 신진욱 등 정당 관계자를 초청하여 한일회담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1964년 3월 30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굴욕 외교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약 1,000명의 군중과 함께 “제2의 이완용을 추방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중구 대안동의 민정당과 민주당 당사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 3일을 기점으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비롯하여 야당 인사와 대학생들의 시위는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시민들도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약 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한일회담 반대를 넘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시위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 3일 오후 6시 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964년 7월 29일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을 포고하여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축소·봉쇄하고자 하였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연내에 한일회담을 종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965년 1월 18일 한일 본회담이 속개되었고, 2월 19일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하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는 1965년 2월 19일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였고, 각 대학의 대학생들은 다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1965년 3월 31일 서울에 거주하는 이종래가 대구시청 광장에서 ‘대일 굴욕 외교’를 비난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대구 지역에서는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가 중심이 되어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1965년 4월 1일에도 수성천 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2만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강연회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굴욕 외교는 즉각 중지하라”, “평화선은 생명선이다. 사수하자”, “매판자본을 배격하자”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65년 4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경북지부는 공화당이 강연회에 시민을 동원하는 행정 당국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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