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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26
한자 -會
이칭/별칭 대구양서조합,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78년 7월 14일연표보기 - 두레회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78년 9월 22일 - 두레회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창립총회 개최
해체 시기/일시 1980년 9월경연표보기 - 두레회 해체
성격 토론 조직

[정의]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사회단체.

[설립 목적]

두레회는 진보적인 서적 보급을 통하여 지역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을 모색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변천]

양서 조합 형식으로 결성된 두레회는 1978년 6월 25일 경북대학교 출신 박명규의 주도로 이윤기, 박태주 등이 모여 가칭 ‘대구양서조합 창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발기인 모집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1978년 7월 14일 1인당 5,000원의 입회비를 낸 조합원이 200여 명이 되었을 때 가칭 ‘대구양서조합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발기인 총회에서 임시 조합장에 서운, 임시 전무에 박태주를 선출하고 직영 서점으로 대구의 계명대학교 부근에 있는 한양서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로 결의하였다.

1978년 7월 17일 대구양서조합 명의로 한양서점을 인수한 뒤 1978년 9월 22일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통과시키고 임원과 이사를 선출하였다. 조합장에 서운, 부조합장에 박명규, 전무에 박태주를 선임하고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활동과 한양서점 운영을 시작하였다.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주로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대학생들과 대학 교수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에는 회원 수가 1,000명에 달할 정도였지만 5·18민주화운동 이후 엄혹한 시국과 정보기관의 탄압으로 탈퇴하는 조합원이 늘었다. 박명규는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간부들 대부분이 구속되면서 1980년 9월경 조직을 해산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두레회는 조합원 중심으로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였으며, 대구 지역 노동야학 활동과 대구 지역 대학들과 연계하여 이념 서클의 MT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운동세력을 연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두레회는 회지 『달구벌』을 창간하여 창간호 2만 부 가량을 인쇄하여 대구 지역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배포하였고 광주양서조합과 긴밀히 교류하는 등 타 지역의 양서 조합과도 연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주화 운동가 및 지역 인사와의 만남, 교양강좌를 개설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소설가 황석영, 염무웅 교수 등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두레회는 운동권 학생들의 원활한 교류의 장 역할을 제공함으로써 반유신운동에 대한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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