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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연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46
한자 民族統一聯盟
이칭/별칭 경북 민족통일연맹,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민족통일경북연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0년 4월 말연표보기 - 민주구국동지회 결성
개칭 시기/일시 1960년 10월 22일연표보기 - 민족통일연맹 민주구국동지회에서 경북시국대책위원회로 개편
개칭 시기/일시 1960년 11월 26일연표보기 - 경북시국대책위원에서 민족통일연맹으로 개편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1년 3월 1일 - 민족통일연맹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개최
해체 시기/일시 1961년 5월연표보기 - 민족통일연맹 해산
성격 통일운동 단체
설립자 안경근|안민생|김성달

[정의]

1960년 4·19혁명 시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통일운동 단체.

[개설]

민족통일연맹(民族統一聯盟)4·19혁명 시기 남북 교류,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안경근(安敬根), 안민생(安民生), 김성달(金星達)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민족 통일운동 단체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경근은 일제강점기 김구를 보좌하면서 밀정 숙청 작업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고 안민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다.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3월 1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통일운동을 고조시켰으며, 4·19혁명 이후 혁신계 인사들이 정당을 떠나 개인 자격으로 통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구성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지방 조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개최된 이대악법반대운동에 참여하며 민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통일연맹은 경북 민족통일연맹, 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 민족통일경북연맹이라고도 하였다.

[설립 목적]

민족통일연맹4·19혁명 시기 자주·평화를 기본 원칙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변천]

안경근은 1960년 4월 4·19혁명이 일어나자 4월 말 민주구국동지회(民主救國同志會)를 결성하였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총선에서 혁신정당이 참패하자 10월 22일 민주구국동지회를 적극적인 행동 단체인 경북시국대책위원회(慶北時局對策委員會)로 확대 개편하였다. 경북시국대책위원회의 위원장에 안경근이 선임되었고 김성달은 부위원장, 안민생은 기획부장에 선임되었다.

경북시국대책위원회는 1960년 11월 26일 민족통일연맹[이칭 경북 민족통일연맹, 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으로 개편되었다. 회원이 1만여 명에 달하였던 민족통일연맹은 대구 지역뿐만 아니라 안동, 예천, 영천, 문경, 고령, 청도 등에도 조직을 편성하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지방 조직으로 합류하였다. 민족통일연맹은 통일 문제 시국 대강연회를 비롯하여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통일운동과 민주·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사건’으로 탄압을 받고 군사정권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북시국대책위원회에서 1960년 11월 26일 확대 개편된 민족통일연맹은 남북 간 서신 왕래의 자유, 경제적 교류, 문화 교류 등 통일 이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과 선전문을 채택하였다. 민족통일연맹의 조직은 위원장 안경근, 부위원장 김성달, 총무위원회 기획부장 안민생, 조사위원장 백규천, 총무위원장 이정상, 선전부장 안잠 등으로 구성되었다.

1961년 2월 25일 민족통일연맹은 상임 집행위원회를 열고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대구 달성공원에서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부위원장 김성달 등은 경상북도 대의원 자격으로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1961년 2월 25일 열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 대회’에 참석하였다. 1,0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 대회장인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단상에는 ‘뭉치자 민족 주체 세력’, ‘배격하자 외세 의존 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1961년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주 평화통일을 추구하기 위한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가 민족통일연맹 주최로 열렸다.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는 김충섭(金忠燮), 이낙호(李樂頀) 등이 연사로 나서 “미소가 문화 교류를 하는데 어찌 우리가 못한단 말이냐? 남한의 면포와 북한의 비료·전기를 교역하고, 통일을 위한 실정을 알기 위하여 인사 교류, 서신 왕래 등을 하자. 1962년 3·1절의 행사는 통일된 민족의 광장에서 하자. 일체의 외부 세력을 배격한다. 선 건설 후 통일론을 배격한다”는 남북 교류를 통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후 참가자들은 현수막과 차량을 앞세우고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4월 5일 상임 집행위원회를 열고 남북 학생 회담 지원의 필요성에 따라 남북 학생 회담의 개최를 지지하는 결의문 작성에 참여하였다. 결의문에는 “가자 북으로 남으로 판문점으로 조국 현실의 지상과제인 남북통일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정의에 불타는 남북 학생들은 과감히 나섰다. …조국 통일의 선봉으로 떠나려는 젊은 사자들의 외침을 듣자. 그리고 마음껏 성원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족통일연맹은 장면 정부의 이대 악법[「데모규제법」·「반공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며 대구 지역에서 결성된 이대악법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가 1961년 4월 7일 수성천 변에서 개최한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대구데모사건]에 참석하였다.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5월 17일 만경관 빈터에서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으나 5·16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군사혁명재판소에 넘겨져 주요 간부들이 징역 5년에서 10년을 선고받는 등의 탄압을 받아 강제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민족통일연맹은 자주적 남북 평화통일을 위하여 민족 통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4·19혁명 시기 민주·민족운동을 고조시켰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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