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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강좌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87
한자 思想講座會
이칭/별칭 맑스주의강좌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2월연표보기~10월연표보기 - 사상강좌회 운영
최초 설립지 대구고등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지도보기
성격 학생운동|독립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운영한 사회주의사상 강좌회.

[개설]

사상강좌회(思想講座會)는 일제강점기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구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강화를 위하여서는 사회과학 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신간회 대구지회를 비롯한 청년 단체의 주요 인물을 초빙하여 운영한 학습 모임이었다.

[설립 목적]

사상강좌회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의 폭압적인 탄압에 저항하고, 독립을 위한 객관적 국내외 정세 인식, 독립운동 노선 이해, 신사회 건설 준비를 목적으로 운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사상강좌회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1927년 2월부터 1927년10월까지 3회에 걸쳐 당시 대구에서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인 박광세(朴光世), 장적우(張赤宇), 김점학(金點學) 등과 일본인 시바타 겐스케[柴田健介]를 강사로 초빙하여 운영한 사회주의사상 강좌회이다. 사상강좌회의 강사들은 대체로 대구청년동맹, 신간회 대구지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운동가였다. 사상강좌회대구6·10만세운동 이후인 1926년 9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학생운동의 강화를 위하여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운영되었다.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남국희(南國熙)가 동교생 윤장혁(尹章赫), 이봉재(李鳳在), 백대윤(白大潤) 등에게 “우리 학생들이 단결하여서 학교와 투쟁한 결과 스트라이크를 하나 무엇을 하나 방법이 졸렬하고 이론 무장이 안 되어 번번이 학교 당국에 패하였다. 따라서 서클을 만들어 전국 학생 단결을 촉진하고, 아울러 사회과학으로 이론 무장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며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제의하였다. 그 뒤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모임을 열고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공부 모임을 전국적 수준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하였다.

1926년 말에서 1927년 초 무렵 사회과학 공부 모임은 식민지 노예교육의 폭압적 탄압에 맞서 체계적인 국내외 정세 인식과 민족운동 방향의 정확한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사회운동가의 지도를 받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학생들은 1927년 2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3회에 걸쳐 사상강좌회를 운영하였다. 1회에는 8명, 2회에는 11명, 3회에는 15명의 학생이 참여하였다. 사상강좌회의 학습 자료로 「제3인터내셔널 강령」, 「조선혁명의 이론적 방법」,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의 대비」, 「레닌 대 트로츠키 정책의 비판」, 「헤이그회[헤이그만국평화회의] 조선 대표 이준의 격분」 등을 이용하였다.

사상강좌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강사들로부터 조선혁명과 민족운동에 대한 노선을 지도받았다. 내용은 실력양성론을 거부하고 혁명에 의한 즉각적인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간회 운동을 지지하여야 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삼동맹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혁명의 성공이 조선혁명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기에 중국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하여 “조선의 교육제도는 제국주의 옹호의 노예교육이자 일본 민족으로의 동화교육이며, 조선 민족의 존엄을 유린하고 민족정신을 마비시키는 비인도적 교육”으로 규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상강좌회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운영한 것으로서 학생운동을 전체 민족운동과 연관하여 사고하게 되었고, 향후 학생운동이 지역의 사회운동과 전체 민족운동과 결속됨으로써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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