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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반대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95
한자 三選改憲反對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운동

[정의]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대구 지역에서 열린 삼선개헌 반대운동.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부와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1969년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없애 장기 집권의 길을 열고자 헌법 개헌을 추진하였다. 1969년 1월 6일 윤재회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이, 1월 7일 윤치영 민주공화당의장 서리가 개헌의 필요성을 표명하면서 개헌 논의가 표면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9년 1월 10일 “개헌이 특별히 필요하면 연말이나 내년 초 논의하여도 늦지 않다”라고 발표하여 개헌에 힘을 실었다. 1969년 1월 17일 윤진오 신민당 총재가 기자회견을 열고 삼선개헌 저지 투쟁을 다짐하였다. 이후 1969년 6월 5일 신민당, 정쟁법 해금 인사, 재야 각계 인사들이 서울YMCA 소강당에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6월 하순부터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개헌 반대 투쟁 태세를 갖추기로 하였다. 각 지역의 대학생들 역시 성토대회, 농성, 시위 등을 통하여 빠르게 반대 투쟁을 펼쳤다.

[경과]

경북대학교에서는 1969년 6월 2일부터 9월 21일까지 경북대학교 사회과학 연구동아리 정사회(正思會)·경북대학교 총학생회·경북대학교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사회 회원들은 1969년 6월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사회 5기 회원인 3학년생 정화영·임구호·남호영·양재영·이진우·한태준 등이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1일 대구 시내 합숙방에서 선언문 등을 비롯하여 시위에 필요한 준비물을 준비하고, 6월 23일을 삼선개선반대투쟁일로 결정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정사회 3학년이 아닌 4학년생들이 삼선개헌반대투쟁의 선두를 맡기를 결정하였다.

1969년 6월 23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생회[회장 권오련]는 약 100명의 학생과 경북대학교 교내 일청담에서 “헌정 질서 파괴하는 개헌 음모 포기하라”라고 선언하고 삼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 벌였다. 6월 28일 경북대학교 총학생회[회장 진원규, 총무부장 홍윤순]도 일청담에서 “삼선개헌 결사반대”를 선언하고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1969년 7월 1일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와 정사회는 일청담에서 함께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하고자 정문으로 향하였으나 총장 이하 보직교수들의 저지로 막혔다.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지만, 정문을 뚫지 못하였다. 후문으로 방향을 튼 시위대는 경찰이 쳐 놓은 저지선을 돌파하고 칠성시장경북도청까지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7월 2일~4일에도 교내 시위 투쟁을 하면서, 교문에서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자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다. 연일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결국, 학교 당국은 휴교령을 내려 시위를 약화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교내에서 숙식하면서 매일 시위와 규탄 대회를 이어 갔다.

1969년 7월 25일 학교 당국은 교수회를 개최하여 시위 주동자 20명 이상에게 처벌을 내렸다. 제적 2명, 자퇴 1명, 무기정학 9명, 유기정학 2명, 근신 처분 8명이었다. 8월 6일 경북병무청은 징집영장을 발부하여 처벌 학생을 강제 입영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와 정사회 소속 간부와 회원들이었다.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이어 온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와 정사회를 약화시켜 삼선개헌반대투쟁을 더는 이어 가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1969년 8월 22일부터 경북대학교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가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와 정사회를 대신하여 시위 투쟁을 이어 갔다. “처벌 학생 구제”, “학생자치활동 원상회복” 등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월 28일에는 경북대학교 교내에서 규탄 대회를 개최하여 “삼선개헌 결사 저지”, “총학생회 기능 정지 즉각 철회”, “학생 처벌 철회” 등을 선언하고, 전국 100만 학도들에게 ‘개헌 반대 전국공동투쟁위원회’를 제안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8월 29일에는 ‘개헌 지지 국회의원 121명’ 화형식을 거행하고, 1969년 9월 1일부터 시험과 학교 등록을 거부할 것을 선언하였다. 오후에는 총학생회장과 정화영이 제적생이라는 이유로 교내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1969년 9월 9일 의과대학 학생 약 200명이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여, “국회는 개헌안을 부결시켜라”, “정부는 처벌 학생을 구제하라”, “학생들의 의사표시를 휴교 조치로 묵살하지 말라”라고 선언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1969년 9월 18일 23시 경북대학교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학생 약 40명과 학생회관 2층을 점거하고 국회 날치기 통과를 규탄하는 농성을 벌였다. “근대화된 날치기에 국민은 통곡한다”, “장기 집권 결사반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등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행동 규약을 선포하였다. 이에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강제해산시키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해산이 어려워졌다. 학교 당국은 농성 학생들에게 협상을 제시하였고, 농성 학생들은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주도한 여정남·문제현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협상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1969년 9월 21일 21시 농성 학생 대표 임구호가 박정기 총장과 학생회관에서 협의안[농성 학생에게 일절 책임 묻지 않기, 학생회 조속히 정상화, 처벌 학생의 피해 최소화]에 합의하고, 해산하였다.

[결과]

여당 자유당은 1969년 9월 정기국회가 개회하면 10일 삼선개헌안을 심의하고 13일 표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면서 표결이 저지되자, 14일 새벽 2시경 국회 제3별관에서 본회의를 개최하여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는 헌법개정안을 정부에 이송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국민투표일을 10월 17일로 정하고, 10월 8일에 그 내용을 공고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선개헌반대투쟁은 대구 지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화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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