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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42
한자 友弦書樓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우현서루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우현서루 폐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1년 9월 15일 - 우현서루 건물에 교남학원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5월 21일 - 교남학원 교명을 대구교남학교로 변경
최초 설립지 우현서루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81[수창동 101-11]지도보기
성격 근대 교육기관|도서관
설립자 이동진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 세워진 근대 교육 기관이자 도서관.

[개설]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대구 지역의 부자인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개인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다.

[설립 목적]

우현서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신문화(新文化), 신교육(新敎育) 보급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우현서루는 1904년 일제가 조선을 침략함에 통분을 느낀 금남 이동진이 개인 재산을 투자하여 세웠고, 이동진의 장남인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1870~1936]가 운영하였다. 이동진은 대구 지역을 대표한 부자였는데, 개인 재산 가운데 절반을 투자하여 우현서루를 운영하고 자선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1911년 일제가 민족 교육기관인 우현서루를 폐쇄하자, 이일우는 ‘강의원(講義院)’이라는 고급 서당과 부인친목회(婦人親睦會)를 설립하였다. 강의원은 홍주일(洪宙一)[1876~1927]이 운영하였고, 부인친목회는 이상화(李相和)[1901~1943]의 어머니 김신자(金愼子)[1876~19047]가 회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21년 9월 15일 홍주일, 김영서(金永瑞)[1880~1975], 정운기(鄭雲騎) 등이 우현서루 건물에 정운기의 명의로 교남학원(嶠南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 5월 21일 교명을 대구교남학교(大邱嶠南學校)[현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로 변경하면서 4년제 중등 교육기관으로 승격되었다. 1924년 5월 교사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57번지로 이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義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교육 기관으로 세워진 우현서루 도서관에는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과 청나라에서 수입한 신학문 관련 서책 수백 종 등 약 10,000권 정도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다. 1904년 이동진이 창설하였으며, 매년 20~30명의 젊은 학생을 선발하여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시켜 약 150여 명의 애국지사를 길러 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1859~1925],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 사건’의 주인공 김지섭(金祉燮)[1884~1928], 이동진의 손자이자 이일우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이상백(李相佰)[1904~1966]·이상화 등을 비롯하여 권일제, 여운향, 김성수 등이 우현서루 출신이다. 또한 1906년 8월경 이일우, 최대림(崔大林), 윤영섭(尹瑛燮), 김선구(金善久), 윤필오(尹弼五), 이종면(李宗勉), 이쾌영(李快榮), 김봉업(金鳳業)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의 사무실이 우현서루에 있었다. 대구 지역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던 곳 역시 우현서루라 할 수 있다.

[현황]

우현서루 터에는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이 세워져 있다. 우현서루 도서들은 현재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이며, 기증 도서는 『사부총감』을 비롯하여 3,938권이었다.

[의의와 평가]

우현서루는 한말 대구 애국 계몽 운동의 산실이자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는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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