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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72
한자 朝鮮勞動組合 大邱評議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2월 10일연표보기 -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결성
성격 노동단체

[정의]

1945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소속 평의회.

[결성]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全國勞動組合大邱評議會)는 1945년 12월 10일 노동조합대구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경북 일원을 대상으로 결성되었다. 노동조합대구협의회는 1945년 10월 24일 대구를 대상으로 조직된 노동운동 단체였다. 노동조합대구협의회는 1945년 11월 5일, 6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한 뒤 1945년 11월 15일 대구공회당에서 대구대의원지방평의회의 이름으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보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상훈(李相薰)의 사회로 진행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보고 강연회는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희형(李喜亨)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대회 보고’, 손기채(孫基採)의 ‘북선(北鮮) 정보’, 윤장혁(尹章赫)의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노동조합대구협의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1945년 12월 10일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위원장은 윤장혁이 맡았다.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지방평의회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결성에 즈음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우리 노동자 계급의 힘찬 단결의 조직체이다. 신정권 수립의 중대 모멘트에 입각한 오늘날 모든 일제의 잔존 세력을 근본적으로 구축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의 음모 술책과 테러 행위를 일소하여 노동자 농민과 일반 근대 대중의 이익을 존중히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근로 대중의 이익을 존중히 하는 가장 정당한 정치 노선을 밟아 우리에게 부과한 역사적 중대 사명을 우리 단결의 힘으로써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6년 2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남북한 전체 21개의 지평, 235개의 지부, 1,676개의 분회의 현황을 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일원이었다.

[활동]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초기에 미군정에 대하여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1946년 2월부터 대구에서 대구전매국,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등에서 노동 파업이 계속되었다.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1946년 5월 2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하였다.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노동 현장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가운데 9월 총파업이 발생하자 1946년 9월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총파업을 진행하였다. 각 산업 현장에는 대구시투쟁위원회 지부가 설치되고, 지부 중심으로 자경대를 편성하게 하면서 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투쟁위원회가 결성되던 날을 기준으로 대구의 9월 총파업은 철도 노동자 1,200명, 섬유 노동자 1,800명, 체신 노동자 1,200명, 출판 노동자 112명, 기타 노동자 660명 등 5,000여 명의 참가로 진행되었다. 또 1946년 9월 30일 기준으로 대구와 경상북도의 30여 개 업체가 9월 총파업에 참여하였다.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결성되던 날 미군정의 요구로 총파업 철회 협상을 진행하였다. 또 9월 30일부터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의 간판을 내려 달라는 미군정 당국과 대치하였다. 그 가운데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시위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구의 9월 총파업10월항쟁으로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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