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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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學徒義勇隊 |
이칭/별칭 | 학도의용결사대,학도의용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6·25전쟁 시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학도의용군.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학생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 내기 위하여 ‘책 대신 수류탄과 총을 달라’면서 자원입대하였다. 자원입대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징집 연령 18세에 미달하는 14세~17세에 불과하여 학도병 또는 학도의용군이라고 불렀다. 학도의용군들은 책 대신 수류탄 몇 개와 총 한 자루를 들고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군번 없는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설립 목적]
대한학도의용대는 한국전쟁 기간에 위기에 처한 국가를 수호하고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변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전세는 더욱 위급하여졌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국군은 계속 후퇴하였다. 6월 29일 피난길에 나섰던 서울 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서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조직하면서 최초로 학도의용군이 편성되었다. 비상학도대 학생 가운데 일부는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가하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로 후방에서 피난민 구호, 전황 보도 및 가두선전 등을 담당하였다. 전세가 악화되면서 수원도 함락되자 비상학도대는 국군을 따라 대구로 남하하였다.
한편 피난길에 나선 김득신 등 700여 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지도 아래 7월 1일 대전에서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였다. 의용학도대는 주로 학도병 모집, 보도선전 등을 담당하였다. 전세가 악화되면서 의용학도대 역시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에서 집결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가 통합하여 1950년 7월 19일 대한학도의용대(大韓學徒義勇隊)를 결성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 가운데 일부는 군번을 받고 전투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였고, 나머지는 북진하는 국군의 뒤를 따라 선무·정훈 활동을 펼쳤다. 또한 후방에 남아 있는 공비 소탕을 돕기도 하고 지리산·내장산 등지서 공비를 귀순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대한학도의용대는 1951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이 복고령(復校令)을 공포함으로써 해산되었으나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학생들은 입대하여 계급과 군번을 받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학도의용군 대부분은 대한학도의용대를 거쳐 군에 입대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는 국군 10개 사단과 예하 부대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하여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다부동 전투, 안동·경주 안강·영천·포항·창녕 등지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 수는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5만 6000명, 서울 6,700명, 경기도 2만 3500명, 충청남도 4만 2000명, 충청북도 2만 1500명, 전라북도 2만 7200명, 전라남도 2만 3800명, 경상남도 6만 5000명, 강원도 6500명, 제주도 3000명으로 총 27만 5200명이었다. 참전 학생 수는 대구 약 2,000명, 부산 약 4,500명, 서울 약 3,200명, 기타 각 도 1만 8000명으로 약 2만 7700명이었다.
[현황]
대구광역시에서는 대한학도의용대의 호국 정신을 기리고자 1979년 5월 30일 남구 대명동 앞산 기슭에 있는 낙동강승전기념관 내에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비’를 세웠다. 대구광역시 남구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6·25 참전 학도의용군의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군번도 없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국군의 승리를 이끄는 데 한몫을 하였던 대한학도의용대의 순수한 애국정신은 국가와 민족의 거울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