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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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革新黨 社會大衆黨統合準備委員會 慶北委員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전개된 혁신당과 사회대중당과의 통합 기구.
[설립 목적]
혁신당·사회대중당통합준비위원회 경북위원회는 혁신당과 사회대중당 당의 통합 교섭을 추진할 목적으로 만든 기구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4·19혁명 시기 혁신당과 사회대중당은 대구에 각기 도위원회를 조직하고 정당 활동을 벌였다. 지역의 혁신정당 대표들이 중앙당에 혁신정당 통합을 압박하자 서울에서는 혁신당, 사회대중당, 사회당 등 3당이 합당을 추진하였다. 1961년 4월 중순 서울에서는 혁신당과 사회대중당이 기본 노선으로 민주사회주의, 통일 방안으로 영세 중립화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에 남북협상안을 주장하여 삼당 합당은 여의치 않았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는 중앙의 통합 추진에 영향을 받아 혁신당과 사회대중당의 통합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대구에서의 양당 통합은 중앙의 전개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혁신당·사회대중당통합준비위원회 경북위원회는 통합 활동 외에도 1961년 3월 1일 대구에서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각종 정당·사회단체 및 학생 단체 대표가 모여 결성한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이대악법반대공투위]에 참여하였다. 이대악법반대공투위는 1961년 4월 2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대구역 광장에서 당국의 집회 불허에도 불구하고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대구데모사건]를 개최하였다. 이대악법반대공투위는 “장 정권 물러가라”, “악질 경찰관 물러가라". “이대악법은 살인법이다. 죽음으로 막아 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대회를 강행하였다. 이날 시위는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 재판에서 ‘대구데모사건’으로 명명되었다.
이대악법반대공투위는 1961년 4월 7일 수성천 변에서 이대악법규탄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대악법규탄궐기대회 참석자들은 수성천 변에서 반월당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혁신당·사회대중당통합준비원회의 간사장 겸 집행위원인 박지사(朴智師)는 1961년 4월 2일 개최된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로 인하여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군사혁명 재판에서 ‘대구데모사건’으로 탄압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혁신당·사회대중당통합준비위원회 경북위원회는 지역 차원에서 당의 통합 운동을 벌이면서도 이대악법반대운동의 확산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