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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호헌투쟁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56
한자 啓明大學校 護憲鬪爭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9년 6월 - 계명대학교 호헌투쟁위원회 3선개헌 반대 투쟁 전개
성격 학생운동

[정의]

1969년 대구광역시에서 조직된 계명대학교 주도 3선개헌 반대 투쟁 단체.

[개설]

박정희 정권은 1969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3선개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야당 정치인, 재야 세력, 대학생 등은 3선개헌 저지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도 각 대학을 중심으로 3선개헌 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계명대학교·경북대학교·영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3선개헌 저지 운동이 진행되었고, 계명대학교에서는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회가 학교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과 일반 학생들이 주도하여 계명대호헌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3선개헌 저지 운동을 펼쳐 나갔다.

[설립 목적]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1969년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대한민국의 6번째 헌법개정을 하였다. 이에 대학생과 야당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3선개헌 반대 투쟁이 진행되었다. 대구 지역의 계명대학교와 다른 대학들도 학생회 간부와 각 서클과 학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개헌반대투쟁위원회[호헌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변천]

계명대학교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던 호헌투쟁위원회는 9월 한 달 동안 지속적으로 개헌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계명대학교 학생 백현국, 임종호, 하정규, 최종성 등 4명은 1970년 4월 말 대구지검에서 8개월에서 10개월의 구형을 받고 8월 24일 전원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69년 6월부터 진행된 계명대학교의 3선개헌 반대 투쟁은 2학기가 개강되자 더욱 확산하였다. 1969년 9월 5일에는 계명대학교 학생 300여 명이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마산대학교의 개헌 지지 결의를 비꼬는 ‘마우대학생(馬牛大學生)’이라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가졌다. 계명대학교 학생들은 3선개헌 반대가 적힌 리본을 달고 독재자 반대와 언론 자유 보장을 주장하는 선언문과 국민과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이후 계명대호헌투쟁위원회 소속 학생 30여 명이 교문에서 연좌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9일까지 낮에는 교정에서 시위를 벌이고 밤에는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였다.

[의의와 평가]

계명대학교 호헌투쟁위원회3선개헌 반대 투쟁은 지속적인 시위로 전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대구 지역민에게 3선개헌의 본질을 폭로하는 활동을 벌여 민주화운동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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