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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74
한자 孫處訥 墓所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능묘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97-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6월 25일 - 손처눌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6월 15일 - 손처눌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34년 9월 12일연표보기 - 손처눌 묘소 조성
현 소재지 손처눌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97-2 지도보기
원소재지 손처눌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97-2
성격 묘소
양식 봉분|상석|묘비
관련 인물 손처눌
봉분 크기/묘역 면적 2m
소유자 일직손씨 모당 종중
관리자 일직손씨 모당 종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대구 지역 유학자 모당 손처눌의 묘소.

[개설]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은 1553년(명종 8) 6월 25일 대구 수성 상동에서 출생하여 1634년(인조 12) 6월 15일 평소에 강학하였던 영모당(永慕堂)에서 82세로 사망하였다. 9월 12일 수성구 황금동[황청동] 선영 아래 손좌(巽坐)에 장례하였다. 장례에 모인 사람은 420여 명이었다. 만사와 제문이 200여 폭이었다. 묘비의 전면에 ‘모당손선생지묘(慕堂孫先生之墓)’라고 적었다. 비문은 문인(門人) 승의랑(承議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호인(鄭好仁)이 짓고, 글씨는 문인(門人) 통훈대부(通訓大夫) 평양서윤(平壤庶尹) 도경유(都慶兪)가 써서, 숭정(崇禎) 10년 정축[인조 15년(1637)] 정월에 건립하였다.

[위치]

손처눌 묘소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97-2번지에 있다.

[변천]

손처눌 묘소는 1637년(인조 15) 정월에 건립하였는데, 비문이 마멸되어 1902년 다시 건립하였다.

[형태]

손처눌 묘소는 봉분이 있으며 묘비는 우측에 있다.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이 있다.

[금석문]

묘갈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의 휘는 처눌(處訥), 자는 기도(幾道)이고, 그 선대는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삼가 살피건대 손씨(孫氏)는 본디 순성(荀姓)이었으니 시조 응(凝)은 신라인이다. 고려에 이르러 지금의 성(姓)을 받았는데, 정평공(靖平公) 홍량(洪亮)은 공민왕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니 공의 10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세경(世經)이니 참봉이다. 조부의 휘는 치운(致雲)이니 현감이다. 부친의 휘는 수(遂)이니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니 충의위 탄(坦)의 따님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후손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6월 25일에 태어났는데 나면서 기량이 뛰어나고 총명이 뛰어났다. 기국(器局)이 높고 넓어서 구분하여 경계를 짓지 않았다. 일을 만남에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 외물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유학하고 장여헌(張旅軒), 서낙재(徐樂齋) 두 선생과 벗하였으니, 학문 연원의 유익함이 유래가 있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로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 편액을 ‘모당(慕堂)’이라 명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곧 호로 삼았다. 매일 아침에 반드시 일찍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였다. 제사에는 한결같이 예의를 따르고 친히 제수를 차려서 비록 나이가 많고 힘이 쇠하여도 일찍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다. 아우 진사 손처약(孫處約)은 호가 ‘오매자(五梅子)’인데 서로 우애가 돈독하여 남들의 이간이 없었다. 차례대로 사람을 잘 이끌어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니, 그 장려와 지도로 인하여 명성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

계해년(1623) 새 임금[인조]이 등극함에 유일(遺逸)을 찾아 구하니 영부(營府)에서 오직 선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명(命)이 때와 어긋나니 이 어찌 선생에게 손익(損益)이 되겠는가?

오호라. 선생의 효성과 우애의 행실과 이치를 얻은 실상은 참으로 크게 남보다 뛰어남이 있었으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으니 이는 곧 호걸의 선비가 아니겠는가?

숭정(崇禎) 갑술년(1634) 6월 15일 술시(戌時)에 역책(易簀)하고 9월 경오(庚午)에 대구부(大丘府) 황청동(黃靑洞) 손좌(巽坐) 등성에 안장하였다. 처음에 광주이씨(廣州李氏)를 맞이하고 뒤에 하성조씨(夏城曺氏)을 맞이하였다. 3남이 있으니 첨(添), 잠(潛), 침(沈)이다. 명(銘)을 붙인다.

선을 즐기고 배움을 좋아하며[樂善好學]

도를 지키고 가난에 편안하였도다.[守道安貧]

덕이 자신에 넉넉하여[德裕於己]

우리 후인을 열었도다.[啟我後人]

전형(典刑)이 이미 멀어졌으니[典刑已遠]

우리 장차 누구를 따를까.[吾將安倣]

삼척의 짧은 비석[三尺短碣]

백세토록 우러르네.[百世瞻仰]

墓碣銘

先生諱處訥字幾道 其先安東府一直縣人 謹按孫本荀姓 鼻祖曰凝 新羅人 至高麗賜今姓 有靖平公洪亮 爲恭愍朝佐理功臣 於先生爲十世祖 曾祖諱世經參奉 祖諱致雲縣監 考諱遂隱德不仕 妣韓山李氏 忠義衛坦之女 牧隱之後也 先生以嘉靖癸丑六月二十五日生 生而岐嶷 聦明絶倫 器宇軒敞 不爲畦畛 遇事剛果 不爲物遷 遊於寒岡鄭先生之門 與張旅軒徐樂齋兩先生爲友 學問淵源之益 有自來矣 自親歿棄擧子業 築室于松楸之下 扁其堂曰慕堂 鄕人仍以爲號 每朝必夙興參祠廟 祭祀一遵禮儀 親執粢盛之供 雖年高力衰 未嘗使人攝也 弟進士處約號五梅子 相與友愛之篤 人無間然 循循然善誘人 敎誨不倦 因其奬進成名者衆 癸亥新化 訪求遺逸 營府獨以先生薦 命與時違 是奚足爲先生加損哉 嗚呼 先生孝友之行 見得之實 誠有所大過人者 而人不知而不慍 此非豪傑之士耶 崇禎甲戌六月十五日戌時易簀 九月庚午 葬于大丘府黃靑洞坐巽原 初娶廣州李氏 後娶夏城曺氏 有三男添, 潛, 沉 銘曰

樂善好學 守道安貧 德裕於己 啓我後人 典刑已遠 吾將安倣 三尺短碣 百世瞻仰

門人承議郞司憲府監察鄭好仁撰 門人通訓大夫平壤庶尹都慶兪書 崇禎十年丁丑 正月 日建

[현황]

손처눌 묘소는 잘 관리되고 있다. 영모당(永慕堂)이 있던 곳에는 청호서원(靑湖書院)이 건립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손처눌연경서원(硏經書院)영모당에서 강학하여 대구를 학술과 교육, 문화의 도시로 만든 인물이다. 손처눌 묘소는 대구 지역의 인사들이 기억하고 기릴 만한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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