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15 |
---|---|
한자 | 玉沽 |
영어공식명칭 | Ok Go |
이칭/별칭 | 대수(待售),응계(凝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구본욱 |
[정의]
조선 전기 대구현령을 역임한 문관.
[가계]
옥고(玉沽)[1382~1434]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대수(待售), 호는 응계(凝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옥전백(玉全伯)이고,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옥안덕(玉安德)이다. 아버지는 진성감무 옥사미(玉斯美)이고, 어머니는 신용겸(辛用謙)의 딸 영산신씨(靈山辛氏)이다.
[활동 사항]
옥고는 1382년(우왕 8)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태어나 대구광역시 군위군으로 이주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어은(漁隱) 민제(閔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399년(정종 1) 식년시에 합격하여 동진사(同進士)가 되었다. 성균관학유와 박사를 거쳐 전적을 역임하였다.
옥고는 1408년(태종 8) 대구현령으로 부임하였다. 5년간 재임하며 백성들을 잘 다스려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동헌을 중수하고 지은 옥고의 「대구동헌중수운(大丘東軒重修韻)」이라는 시가 있다. 『대구읍지(大丘邑志)』에 실린 “전후의 수령들은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琴柔)와 옥고는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하였다”라는 아전 배설(裵泄)의 말을 통하여 옥고의 지방관으로서의 풍모를 짐작할 수 있다.
옥고는 이후 예조정랑·예조좌랑·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고, 1434년(세종 16) 6월 1일 사망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학문과 저술]
옥고의 저술로는 『응계실기(凝溪實紀)』가 있다.
[묘소]
옥고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옥고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