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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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甫欽 |
영어공식명칭 | Lee Boheum |
이칭/별칭 | 경부(敬夫),대전(大田),충장(忠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세욱 |
[정의]
조선 전기 지대구군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이보흠(李甫欽)[1397~1457]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흡(李洽)이고,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이석지(李釋之)이다. 아버지는 부사직을 지낸 이현실(李玄實)이고, 어머니는 보승낭장 장표(張彪)의 딸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부인은 영천최씨(永川崔氏)이며, 영천이씨 대구 입향조인 이보관(李甫款)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이보흠은 1397년(태조 6) 영천 대전리[현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29년(세종 11) 식년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 벼슬길에 올랐고, 집현전박사가 되었다. 1448년(세종 30)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범 실시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452년(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정한 등급을 뛰어넘어서 벼슬을 시킴]되었고, 1454년(단종 2)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보흠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낸 이후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좌천되었다. 1457년(세조 3) 순흥[현 경상북도 영주시]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와 함께 지방 관리, 군인, 향리 등과 규합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평안도 박천에 유배되었다가 10월에 죽임을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보흠의 행적을 엮은 『대전실기(大田實記)』 5권 2책이 전한다.
[묘소]
이보흠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죽곡1길 68-12[죽곡리 847]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보흠은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월 장릉(莊陵)의 배식단(配食壇),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영주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