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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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𨯶榮 |
영어공식명칭 | Lee Heonyoung |
이칭/별칭 | 경도(景度),경와(敬窩),동련(東蓮),문정(文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837년 - 이헌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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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67년 - 이헌영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70년 - 이헌영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이헌영 조사시찰단으로 일본 시찰 |
활동 시기/일시 | 1882년 8월 - 이헌영 승정원우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1년 - 이헌영 경상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이헌영 경상북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이헌영 경효전제조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 이헌영 사망 |
거주|이주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부임|활동지 | 경상감영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경상도관찰사 |
[정의]
개항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이헌영(李𨯶榮)[1837~1907]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도(景度), 호는 경와(敬窩) 또는 동련(東蓮)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명희(李命喜)이고, 할아버지는 이서헌(李書憲)이다. 아버지는 이정태(李鼎台)이다. 어머니는 조재희(趙在禧)의 딸이다.다.
[활동 사항]
이헌영은 1867년(고종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7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77년에 병조참지에 제수되었고, 1878년에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헌영은 1881년 2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과거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지칭되기도 함]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개화파 관료들이 집권하자 이헌영을 포함한 12명을 명목상으로는 민정 시찰을 위한 동래부암행어사라고 임명하고, 실제로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국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때 이헌영이 시찰한 부서는 세관(稅關) 관계 기구였다. 이헌영은 이 시찰로 인해 개화파(開化派) 관료로 성장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개화 정책 담당 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부경리사가 되어 통상사당상에 임명되었다.
이헌영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에는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다. 1886년에는 참의내무부사로 일본주차판사대신(日本駐箚辦事大臣)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동지춘추관사·병조참판·한성부좌윤·대사헌·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공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헌영은 1891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하던 해에 경상도의 각 고을에 향약(鄕約)의 규례(規例)를 담은 책인 『향리약속(鄕里約束)』을 배포하고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그 결과 고을의 수령들과 양반들이 향약 시행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의성군 비안현(比安縣)에서 김종호(金鍾鎬)가 만든 『향리약법(鄕里約法)』이나 영천군(榮川郡)에서 이희로(李熙魯)가 작성한 「향리약법후서(鄕里約法後敍)」는 이헌영이 베포한 『향리약속(鄕里約束)』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문헌이다.
이헌영은 1902년(광무 6)에 경상북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대구로 부임하였고, 1904년에 경효전제조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7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헌영의 저술로는 문집인 『경와만록(敬窩漫錄)』이 있다. 개화파 관료로서 편찬한 저술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일본문견별단초(日本聞見別單草)』, 『일본세관시찰기(日本稅關視察記)』, 『조선국수출입반년표(朝鮮國輸出入半年表)』 , 『나가사키세관규식초(長崎稅關規式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