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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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坎元 |
영어공식명칭 | Seo Gam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일주 |
활동 시기/일시 | 1484년 - 서삼원 구언소를 올려 추국을 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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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서감원 묘소 -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2동 산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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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덕산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46길 5-3[황금동 258]![]()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달성(達城) |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학자.
서감원(徐坎元)[?~?]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서침(徐忱)이고, 할아버지는 광흥창부승(廣興倉副承) 서문한(徐文翰)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서섭(徐燮)이고, 어머니는 채윤(蔡崙)의 딸 인천채씨(仁川蔡氏)이다. 형은 서진원(徐震元)이고, 동생은 서간원(徐艮元)이다.
서감원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과거 준비를 하였지만, 아버지 서섭이 단종(端宗)을 보필하려다 핍박을 당하자 관직의 꿈을 접고 초야에 물러나 지조를 지켰다.
『성종실록(成宗實錄)』 8월 병진 조 기사에 따르면, 1484년(성종 15) 가뭄이 김해 피해가 크자 성종이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널리 구언(求言)을 요청하였다. 이때 서감원은 성종의 실정은 조목조목 지적하는 구언소(求言疏)를 올렸다. 성종은 대부분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도 관리의 파직 및 인사이동에 관한 비판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추국하라고 경상도관찰사 이육(李陸)에게 명을 내렸다. 서감원은 여러 차례 경상감영으로 불려가 추국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서감원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2동 산148에 있다. 묘소 앞에는 재실인 수덕재(修德齋)가 건립되어 있다.
서감원은 1926년에 후손들이 서섭을 기려 세운 첨모재(瞻慕齋)에 배향되었다. 이후 첨모재가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승격되면서 사당인 경의사(景義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