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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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奎千 |
영어공식명칭 | Back GueCh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 백규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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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2년 - 백규천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전문부 법과 3년 중퇴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8월 - 백규천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0월 - 백규천 경상북도시국대책위원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1월 - 백규천 민족통일경북연맹 가입 |
출생지 | 병방동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
학교|수학지 | 리쓰메이칸대학 - 일본 도쿄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통일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민족통일경북연맹 조사위원장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통일운동가.
[개설]
백규천(白奎千)[1915~?]은 1915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에서 태어났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시국대책위원회와 경북민족통일연맹을 통하여 자주적 남북통일과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백규천은 1942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전문부 법과 3학년을 중퇴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토목 청부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54년 8월 19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아 투옥되었고, 1958년 7월 29일 만기 출소하였다.
백규천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10월 대구에서 결성된 경북시국대책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60년 11월 경북시국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여 결성된 경북민족통일연맹[민족통일경북연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경북민족통일연맹의 상임위원회에 참석하여 남북 서신 왕래의 자유, 경제적 교류, 문화 교류 등 통일 이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과 선전문을 채택하였다.
백규천은 1961년 2월 25일 경북민족통일연맹을 대표하여 서울 천도교회당에서 열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참석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가 열린 천도교 회당 내부 단상에는 ‘뭉치자 민족 주체 세력’, ‘배격하자 외세 의존 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1961년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경북민족통일연맹의 주요 구성원과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하기 위한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백규천은 대회 후 참가자들과 함께 현수막 차량을 앞세우고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와 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와 선전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1961년 4월 5일 경북통일연맹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지원의 필요성에 뜻을 같이하였다. 백규천은 4월 7일 수성천 변에서 열린 이대악법공동투쟁위원회 주최의 이대악법반대규탄대회에 참석하였다.
백규천은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뒤 경북민족통일연맹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 넘겨져 1962년 1월 9일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