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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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鍾翊 |
영어공식명칭 | Song Jong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재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송종익(宋鍾翊)[1887~1956]은 1887년 2월 2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06년부터 미국에 거주하며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송종익은 1906년 4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2월에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처단하고 체포되자 교민들이 재판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때 송종익은 재무(財務)를 맡아 경비 조달 및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였다.
송종익은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언(洪焉) 등 8명의 창립발기위원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고 후일 이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 1월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北美實業株式會社)를 조직하고 출자금 9만 5000달러를 모집하였고, 쌀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27년 문을 닫고 말았다. 또한 1932년 1월 재차 흥업회사(興業會社)를 조직하여 재원 확보에 노력하였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재무로 활동하였다.
송종익은 1936년 5월 각 단체를 통합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8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의장,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재무로 선임되었다.
송종익은 1944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하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13개 한인 단체 대표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하여 개조된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에는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의 재무로 선임되어 광복된 조국에 귀국하였다가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송종익은 1956년 1월 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송종익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