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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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Iwase Shizuka|암뢰정(岩瀨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일본인 자본가.
[활동 사항]
1904년 대구를 중심으로 철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일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04년 8월 일본인들이 거류민단(居留民團)을 조직하자 이와세 시즈카[岩瀨靜]도 가입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1906년 11월 25일 대구 거주 일본인들과 함께 오카모토 리헤이[岡本利平] 부이사관의 지원을 받아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일본인들과 함께 달성공원을 관리하였다.
1907년 일제의 주도로 진행된 화폐정리사업으로 일본인들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당시 탁지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는 화폐정리사업 과정에서 신화(新貨) 30만 원을 대구에 배정하였고, 대구이사청은 이와세 시즈카를 비롯한 일본인 유력자와 대구농공은행 대주주들에게 2년 거치 무이자 상환이라는 특혜를 주었다. 이때 이와세 시즈카는 1907년 서상돈(徐相敦)과 함께 탁지부가 불하한 묘포(苗圃) 2만여 평을 신화(新貨)로 매수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 이후 대구제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서상돈을 이사, 박기돈(朴基敦)을 감사로 임명하였다.
이와세 시즈카는 1906년 대구 성벽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구도로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대구의 일본인 사회는 4대문에 각 3명씩 12명의 위원을 지명 위촉하였는데, 이와세 시즈카는 서문위원이었다. 일부 위원들이 조선 정부의 허가 없는 성벽 철거를 반대하였지만, 이와세 시즈카 등 다수파는 성벽 철거에 찬성면서 성벽 철거 과정에서 나온 토사로 북문 쪽 저습지인 도원동을 매립하여 유곽을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와세 시즈카 등 주류파에 의해 대구 성벽은 철거되었으며, 1907년 대구전매지국의 연초공장 동편에 대구 유곽도 설치되었다. 이와세 시즈카는 대구 유곽 예정지 주변 수만 평의 땅을 매입하여 시세차익을 노렸으나 땅값이 오르지 않아 큰 손해를 보고 땅을 처분하였다.
이와세 시즈카는 1910년대 중반까지 대구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하였고,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1911년 대구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920년 남조선철도(南朝鮮鐵道)가 설립될 때에는 자본금 1,060엔을 투자하여 대주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