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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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龍魯 |
영어공식명칭 | Lee Yongn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 이용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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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2년 - 이용노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이용노 베이징 한국독립군정보원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2월 - 이용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으로 임명 |
출생지 | 하빈면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
학교|수학지 | 주오대학 - 일본 도쿄도 하치오지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 |
[정의]
대구 출신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
[개설]
이용노(李龍魯)[1899~?]는 1899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참여하고 중국 베이징 한국독립군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을 지냈다.
[활동 사항]
이용노는 일본 유학 중 도쿄에서 3·1운동을 겪었다. 그 직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서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많은 자금이 필요하자 이용노는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용노는 1922년 무렵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재일한인학생기독교청년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약 7개월간 구속되어 1년을 중퇴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34년 무렵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 한국독립군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용노는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공포됨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본래 목적이 실현되기 전에 이승만 정권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용노는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회가 구성될 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위원장은 정운일이고 위원에는 이용노를 비롯한 송전도·방한상·정계환 등이 임명되었다. 경북특위는 동성로에 있는 대구지법 소년부지원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장이 발부된 것이 30건에, 18건이 조사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산 조치로 말미암아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용노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대구·경북 지역에서 발생한 피학살자 사건의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가해자 처벌 및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위한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이용노는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전국피학살자유족회의 결성을 추진하여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소에 회부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