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701 |
---|---|
한자 | 三頀- |
영어공식명칭 | Samho Group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1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노광 |
설립 시기/일시 | 1946년 6월 - 삼호공업사 설립 |
---|---|
이전 시기/일시 | 1948년 3월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115에서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1070으로 이전 |
개칭 시기/일시 | 1948년 3월 - 삼호공업사에서 삼호방적으로 개칭 |
개칭 시기/일시 | 1951년 12월 - 삼호방적에서 삼호방직으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삼호공업사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115 |
주소 변경 이력 | 삼호방적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1070 |
성격 | 면방직 |
설립자 | 정재호 |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 있었던 면방직 지주회사.
[개설]
삼호그룹 창업자 정재호(鄭載頀)[1913~2006]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32년 3월 도쿄의 무사시노고등공고[武蔵野高等工高] 기계과를 졸업한다. 1932년 4월 오사카 한신메리야스공업사[阪神莫大小1工業社]에 입사하여, 이사를 역임하는 등 3년간 일본에서 경영 수업을 하였다.
1935년 5월 일본에서 귀국한 정재호는 서문시장에서 가내공업인 삼호공업사를 설립한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메리야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장래 굴지의 기업을 이루는 기초를 닦았다. 이어서 삼호메리야스[三頀莫大小] 공업사를 창립하여 서민의 생활필수품인 양말과 내의를 생산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기에 생필품이 매우 부족하던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내의나 양말 분야는 생산 공장이 별로 없어서 물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메리야스 공업사는 국민들의 생필품 조달에 기여하며 민족자본을 축적하는 발판이 되었다.
정재호는 1946년 6월 철공장과 제재공장을 병설하였고,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115번지에 삼호공업사를 확대, 개편하였다. 삼호공업사는 나중에 삼호그룹의 토대가 된다. 1948년 3월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1070번지에 자본금 3억 원으로 삼호방적을 설립하였으며, 1948년 11월에는 방기[방적기계] 2,800추를 설치하고 조업을 개시하였다. 1950년 12월에는 방기 3,200추를 설치해서 생산능력이 총 6,000추로 확대되었다. 1951년 12월에는 적산 어망 기업인 계강회사(溪鋼會社)를 불하받은 후 자본금을 10억 원으로 증자하여 삼호방직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52년 3월 방기 1,200추를 증설하여 전국 규모의 섬유업체로 부상하였다.
삼호방직은 1951년 10월 대전광역시 유천동 10번지에 있는 풍한방직[전 조선오우방적(朝鮮吳羽紡績)]을 21억 5000만 원에 불하받아 1953년 3월 대전방직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에는 6·25전쟁 특수로 확보한 자금으로 최대 규모의 면방업체인 조선방직 부산공장까지 불하받았다. 1959년 10월 조선방직을 인수함으로써 정재호는 직접 창업한 삼호방직 외에도 적산인 조선방직과 대전방직까지 확보하여 국내 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하였다.
1957년에는 조선저축은행을 불하받고, 1958년에는 제일은행의 귀속 주식을 불하받아 실질 소유주로 등장하면서 은행 융자 규모 면에서 약 84억 7000만 환을 기록하는 등 국내 재벌 중 단연 1위를 기록하였다.
1960년부터 1970년대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호그룹은 재계 1위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삼호그룹이 날로 번창함에 따라 정재호 창업자는 우리나라 무역업계의 선구자로서 삼호무역, 삼호방직, 대한와사산업, 제주축산개발, 범진가스, 동화전통사 등 10여 개 회사를 이끌며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1956년 동화통신사와 1964년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척박했던 우리 문화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정재호 창업자는 기업인으로서 활약 외에도 국가경제를 견인하는 중요 직책을 맡았다. 서울 상공회의소 부회장[1954년]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60년]을 역임하며 국가경제에 공헌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계명대학교 법인이사로 재임하면서 교수들의 연구 활동을 위한 교수 연구관인 ‘의양기념관’ 건립 및 여학생 기숙사로서 당시에 보기 드문 시설을 갖춘 ‘명교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재계 1위였던 삼호그룹이 하향길로 접어드는 신호는 1967년 조선방직 매각과 1968년 제일화재 처분이었다. 1968년 4월 조선방직은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광역시에 인계되었다. 화학섬유의 등장에다 방만한 경영, 기계의 노후화 등이 겹치면서 1969년 7월 부산광역시가 법인 청산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해산시켰으며, 제일화재해상보험은 1968년 9월 한화그룹에 넘겨졌다. 삼호그룹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1972년 8월 3일 발표된「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8·3조치] 이후이다. 1973년 4월 81개 업체 73명의 반사회적 기업인 명단이 발표됐는데, 삼호그룹도 반사회적 기업으로 명단에 올라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삼호그룹은 창업자 정재호 박사의 근면성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56년 동화통신사, 1964년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하였으며, 대학 설립 초기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계명대학교에 재정을 지원하여 대학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계명대학교는 의양 정재호 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서캠퍼스에 ‘의양관’을 건립하였다. 정재호 창업자는 서울 상공회의소 부회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며 경제개발 초기 한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