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815
한자 貯水池
영어공식명칭 Reservoir
이칭/별칭 못(池),제언(堤堰)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우종현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물을 저장·조정·조절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수리 시설.

[개설]

저수지(貯水池)는 둑을 축조하여 물의 저류·조정·조절 등을 하기 위한 인공적인 못이다. 개념적으로 댐은 유수를 저장 또는 취수할 목적으로 축조한 구조물이며, 저수지는 댐에 의하여 조성된 인공 호수를 말한다. 그러나 댐과 저수지 등은 혼용되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대규모 및 다목적인 경우는 댐으로, 소규모 농촌용수의 경우는 저수지로 부르기도 한다.

저수지는 수리 시설 기능의 분화로 생겨난 보(洑)나 방조제(防潮堤) 등과도 구분된다. 보는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에 끌어들이려고 수위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둑으로 된 수리구조물을 말하며, 방조제는 해안에 밀려드는 조수를 막아 간석지를 이용하거나 하구나 만 부근의 용수 공급을 위하여 인공으로 만든 제방을 말한다.

[역사]

우리나라의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記)」 다루왕 6년(33년)에 “정월에 영을 내려 남주군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春正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내용이다. 또, 「신라본기(新羅本紀)」 일성왕 11년(144년)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修完堤防 廣闢田野]”는 기록으로 보아 수도작(水稻作)이 널리 보급되면서 2세기에 들어 수리 시설의 인공적 축조가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저수지에 대한 본격적 기록은 『삼국사기』「신라본기」 흘해왕 21년(330년)에 “비로소 벽골지를 축조하였으니 제방의 길이 1,800보였다[始開碧骨池 岸長千八百步]”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라북도 김제군의 벽골제는 제방 길이 3,245m, 제방 기부(基部)의 너비 21m, 제방 상부의 너비 10m, 제방 높이 5.7m, 저수 면적 37㎢로 알려진 큰 규모의 저수지이며,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백제의 영역에서 축조되었다. 861년(신라 경문왕 1)에 축조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제방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도 저수지와 관련한 다양한 기록이 전하지만, 근대적인 토목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 수리 시설이 시작된 것은 1906년 4월이다. 탁지부령(度支部令) 제3호로 시행된 「수리조합조례(水利組合條例)」가 발표되면서 제도적인 윤곽이 비로소 잡히기 시작하였다. 1910년 당시의 수리조합 수는 6개였고, 1909년 전국의 크고 작은 저수지는 모두 2,781개였다. 수리 혜택을 본 몽리면적(蒙利面積)은 7,980㏊로서 저수지 1곳당 평균 몽리면적은 2.9㏊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정책의 하나로 미곡 증산을 기하고자 수리 시설을 계속 확장하였다. 1935년 저수지 수는 8,456개로 증가하고, 몽리면적도 모두 23만 4000㏊에 이르러 저수지 1곳당 평균 27.7㏊의 몽리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광복 후 정부는 쌀 증산을 위하여 농업용수 개발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면서 아산호·남양호·삽교호·대호·담양호·장성호·영산호 등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 결과 1995년 현재 전국의 저수지 수는 1만 8161개소로 증가하였으며, 이를 관할하는 농지개량조합의 몽리면적은 51만 1000㏊로 확대되었다.

[대구의 제언]

저수지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제언(堤堰)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저수지의 물은 지표수 유량을 조절하여 수력발전과 상수도 및 공업용수로도 사용할 뿐 아니라 관광 용지로도 개발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띠어 수자원의 종합적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대구광역시는 북쪽 팔공산과 남쪽 앞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지만, 평평한 벌판이 아니라 구릉성 산지와 크고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분지이다. 또한 금호강 주변의 저지대는 범람원 충적평야가 많다. 따라서 큰비가 내리면 크고 작은 하천과 강들이 범람하였고 매년 홍수로 피해를 입자 대구 사람들은 수로를 돌리고 제방을 축조하는 한편 저수지를 만들어 수해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 저수지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증축되거나 확장되었다.

고대 수리 시설도 있었다. 10세기 초 최치원이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는 ‘불체지’, ‘천왕지’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15~16세기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대구읍지(大丘邑誌)』에도 불상지[제], 성당지 등 여러 저수지가 나오는데, 불상지성당지 등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저수지로 알려지고 있다. 감삼지천왕당지, 남소 등은 조선시대 지리지와 『대구읍지』 등에 나타나지만, 대구 시내에 있었던 오래된 대부분의 크고 작은 저수지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도시의 팽창과 개발로 매립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에 기록된 대구 도심의 저수지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옛날 저수지는 성당못수성못밖에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150권 경상도 경주부 대구군에 의하면 “큰 방죽[大堤]이 4이니, 성당불상(聖堂佛上), 둔동(屯洞), 부제(釜堤), 입암(笠岩)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1768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읍지』에 나타나는 조선시대 대구의 제언은 모두 80개이다. 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감삼제(甘三堤)로서 둘레가 6,410척이고 수심이 9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다음으로는 둘레가 4,295척이고 수심이 5척 3촌으로 기록된 대불상제(大佛上堤), 둘레가 3,290척이고 수심이 7척으로 기록된 성당제(聖堂堤) 순이다. 이들 저수지 중에서는 성당제만 규모가 30% 정도로 축소된 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감삼제와 대불상제는 도시개발에 따라 매립되어 현재는 흔적이 없다. 1899년에 편찬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대구 지역 내 94개 제언과 87개의 방보(防洑)가 기록되어 있다.

[현황]

대구광역시에는 2020년 말 현재 농업생산기반 시설로 관리되는 저수지가 총 199개가 있는데,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이후 축조된 저수지이다. 전체 저수지 중에서 달성군이 98개로 가장 많이 분포하며, 동구 49개, 수성구 24개, 북구 23개, 달서구 5개 순이며, 중구와 서구, 남구에는 저수지가 없다. 이 중에서 관리주체별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저수지가 177[88.9%]개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는 저수지는 22개[11.1%]이다. 한편 대구광역시에 분포하는 저수지는 전국 저수지 수 17,139개의 0.6%에 불과하여 비중이 낮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