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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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仙齋 |
영어공식명칭 | Nakseon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199길 59-8[호산동 259]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본욱 |
현 소재지 | 낙선재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199길 59-8[호산동 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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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낙선재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199길 59-8[호산동 259] |
성격 | 재실 |
양식 | 목조 와가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달성서씨 낙재 문중 |
관리자 | 달성서씨 낙재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한 서사원 추모 재실.
[개설]
낙선재(樂仙齋)는 1860년경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소가 있는 파산(巴山) 아래에 건립한 재실이다. 서사원은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전경창(全慶昌)[1532~1585]·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장현광(張顯光)·김우옹(金宇顒)·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지역 유림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왜적을 방어하였다. 1596년 8월에 천거를 받아 충청도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597년 선교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금호강 변에 선사재(仙査齋)를 지어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1605년부터 선사재와 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통강(通講)을 실시하여 대구 지역 유학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낙선재 서쪽에 금호강이 흐르고 강창교 북쪽에 이락서당이 있다. 이락서당은 서사원의 교육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락서당에서 금호강을 따라 북쪽으로 4㎞ 정도 올라가면 서사원의 강학소인 선사재(仙査齋)가 있다.
[위치]
낙선재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259에 있다.
[변천]
낙선재는 1860년경에 건립한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30년부터 2년간 성서초등학교 전신인 성서공립보통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기 이전에 임시 교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형태]
낙선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남향이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