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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108
한자 鳳德洞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9년 - 「봉덕동」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
관련 지명 봉덕동 -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터줏대감|노인
모티프 유형 지명유래담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의 지명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봉덕동(鳳德洞)」은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봉덕동의 지명 유래에 관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봉덕동」은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은 한때 대구부 상수서면(上守西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통합되면서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봉덕동’이라는 명칭은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鳳山洞)과 덕산동(德山洞)을 합쳐 부른 것이다. 봉덕동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897] 시절 흉년이 계속되어 나라 사정이 어려울 때였다. 이 동네에 사는 터줏대감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수도산(修道山) 기슭에 있는 웅덩이 물을 저녁마다 떠서 봉황이 마시도록 부근에 놓아두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연 물줄기가 잡혀 훌륭한 저수지를 만들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터줏대감에게는 ‘대봉(大鳳)’, ‘봉덕(鳳德)’, ‘봉산(鳳山)’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다. 터줏대감이 세 아들에게 근처의 논밭을 물려주어 살게 한 것이 바로 대봉동, 봉덕동, 봉산동이라고 한다.

[모티프 분석]

「봉덕동」은 지명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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