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24 |
---|---|
한자 | 隱跡寺- 由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순환로 574-120[봉덕동 1572]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앞산에 있는 은적사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은적사의 유래」는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앞산에 있는 은적사(隱跡寺)에 얽힌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은적사의 유래」는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와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앞산에 있는 은적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견훤(甄萱)[867~936]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경애왕(景哀王)[?~927]이 고려 왕건(王建)[877~?]에게 구원병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와서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지금의 동화사(桐華寺)]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왕건은 신숭겸(申崇謙)[?~927]과 김락(金樂)[?~927]의 지혜로 겨우 사지에서 벗어났지만 신숭겸과 김락은 팔공산에서 전사하였다. 신숭겸이 묘책을 발휘한 곳은 후에 ‘지묘동(智妙洞)’이라 불렀다.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은적사 대웅전 우측 대나무 숲속에 있는 자연 동굴에 숨었다. 왕건이 굴에 숨자 왕거미가 나타나 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서 견훤의 추격병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건은 동굴에서 사흘간 머문 후 안일사(安逸寺)가 있는 곳에서 3개월 동안 쉬고 황악산(黃嶽山)을 넘어 고려로 돌아갔다. 그 뒤 왕건은 사흘간 보낸 굴이 있는 곳에 승려 영도를 보내어 숨을 ‘은(隱)’, 자취 ‘적(跡)’을 써서 ‘은적사’라는 사찰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은적사의 유래」는 사찰 연기 설화를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