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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153
한자 -由來 -事緣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 대구직할시 중구에서 펴낸 『달구벌의 맥』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1년 - 「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Ⅰ에 수록
관련 지명 건들바위 -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2동 735-28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점쟁이|무당|부인|이서|서거정
모티프 유형 기자신앙|지명유래담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있는 건들바위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있는 건들바위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은 1990년 대구직할시 중구에서 펴낸 『달구벌의 맥』과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봉산시장에서 수도산(水道山)으로 뚫린 신작로 중간 우측에 건들바위가 있다. 건들바위[대구입암(大邱笠巖)]는 1982년 6월 29일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건들바위가 어느 때부터 생긴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바위의 모습이 갓을 쓴 노인과 같다고 하여 ‘입암(笠巖)’, 즉 ‘삿갓바위’라고 불렀다. 건들바위는 기이하게 생겨 기자신앙(祈子信仰)의 대상이 되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점쟁이와 무당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한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았다고 한다.

원래 용두산(龍頭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대구천건들바위 앞으로 지나 달성공원을 지나고 달서천(達西川)으로 흘렀다. 1776년(정조 1)에 부임한 대구판관 이서(李漵)가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재(私財)로 제방을 만들어 물줄기를 돌린 것이 신천(新川)이라고 알려졌으나, 훨씬 이른 문헌 『해동지도(海東地圖)』, 『광여도(廣輿圖)』,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이미 ‘신천’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건들바위 일대는 제방을 쌓기 전에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대구십경(大邱十景)[대구십영] 중 2경[2영] 입암조어(笠巖釣魚)건들바위를 가리킨다.

烟雨空濛澤國秋(연우공몽택국추)[이슬비 자욱이 가을을 적시는데]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잔챙이야 적잖게 건지겠지만]

不釣金驚鉤不休(부조금오조불휴)[금자라 낚지 못하여 자리 뜨지 못하네]

한편, 옛 대구천은 여러 차례 도시개발로 물길은 사라지고 현재 복개된 상태로 남아 있다. 1994년에는 조경공사를 하여 분수와 계류 등을 새로 설치하여 물이 흐르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모티프 분석]

「건들바위의 유래 및 사연」은 기자신앙과 지명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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