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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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戊戌十一月在禁獄 次李槐丈逢韻 |
영어공식명칭 | Reply Lee-Bong's Poem While In Prison In 1598 |
이칭/별칭 | 「무술년 11월 감옥에 있으면서 이봉의 시에 차운함」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 저자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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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8년 -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 저자 서사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낙재집』 간행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산격동 산79-1] |
배경 지역 | 서사원 본가터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한시|오언율시 |
작가 | 서사원 |
[정의]
1598년에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의병장이자 학자인 서사원이 구금된 상태에서 이봉의 시에 차운한 한시.
[개설]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戊戌十一月在禁獄, 次李槐丈逢韻)」의 저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이봉(李逢)[?~?]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자운(子雲)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은 1598년(선조 31) 10월에 명나라 장수가 내려올 때 역참에 나와 접대하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서사원이 체포·구금되었을 때 이봉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작품이다. 1598년 2월 서사원은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을 지어 여러 고을의 지인들을 두루 설득하여 군량을 충당하고, 8월에는 충주에 있던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을 대리하였다. 또한 왜구가 호남에서부터 쳐들어와 청주, 진천, 청안 등지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충주로 달려가 의병을 소집하기도 하였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죽은 이를 조문하고 산 자들을 위문하며, 공무의 여가에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사원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장수의 도착 사정을 안찰사가 서사원에게 사전에 통보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구금된 것이다.
2008년 발행한 『국역 낙재선생문집(國譯 樂齋先生文集)』에서는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무술년 11월 감옥에 있으면서 이봉의 시에 차운함」이라고 표기하였다.
[구성]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내용]
감유기명주(敢有欺明主)[감히 임금을 속이랴]
우충증재천(愚忠證在天)[나의 충정 하늘은 아시리]
조개미신일(雕開未信日)[칠조개가 믿지 못한 날]
백옥거조년(伯玉遽徂年)[거백옥이 갑자기 간 해]
죄극관삼유(罪極寬三宥)[큰 죄를 세 번이나 관대히 용서하고]
은심대일현(恩深貸一懸)[깊은 은혜로 한 목숨 살려 주셨다]
추건혈읍지(追愆血泣地)[허물 따라 피눈물 흘리는 처지에]
개권대전현(開卷對前賢)[책을 펼쳐 옛 현인을 대한다]
[특징]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은 ‘선(先)’ 운목이 사용된 오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무술십일월재금옥 차이괴장봉운」은 서사원의 억울한 심정이 드러나 있지만 변치 않는 충정을 드러내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는 자세를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