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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56
한자 朴重陽
영어공식명칭 Park Jungyang
이칭/별칭 박원근(朴源根),야마모토[山本信],해악(海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4년 5월 3일연표보기 - 박중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4년 3월 - 박중양 일본군 제1사단 고등 통역관 대우로 러일전쟁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11월 - 박중양 농상공부 주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5월 - 박중양 일본에서 개최된 대관병식에 의친왕의 통역 수행원으로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7월 - 박중양 궁내부 주전원 경위국 경무관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박중양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6월 - 박중양 평안남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8월 - 박중양 경상북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3월 31일~1921년 2월 12일 - 박중양 조선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찬의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박중양 대구 자제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1년 2월 - 박중양 황해도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2월 - 박중양 충청북도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6월~1941년 5월 - 박중양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7월 - 박중양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0월 1일 - 박중양 영남명덕회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5월 - 박중양 중추원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4월 - 박중양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7월 - 박중양 조선국민의용대 총사령부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1월 - 박중양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몰년 시기/일시 1959년 4월 23일연표보기 - 박중양 사망
활동 시기/일시 2009년 - 박중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
수학지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 - 일본 도쿄
수학지 부기학교 - 일본 도쿄
성격 친일 반민족 행위자
성별 남성
대표 관직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가계]

박중양(朴重陽)[1874~1959]은 1874년 5월 3일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에서 아전 가문 출신의 박정호(朴鼎鎬)와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악(海岳)이며, 다른 이름은 박원근(朴源根)이다.

[활동 사항]

박중양은 1896년 10월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경찰 사무와 감옥 제도를 익혔다. 1903년 일본 도쿄 부기학교에서 은행 업무를 배웠다. 일본 유학 동안 박중양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였다.

박중양은 1904년 3월부터 두 달 동안 일본군 제1사단의 고등 통역관 대우로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평안북도 철산과 용암포 그리고 안동현 등지에서 복무하였다. 박중양은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로 대구에 들어와 살았다. 1906년 5월 군부 군기창 기사로 발탁되어 대한제국 파견 대신 의친왕의 통역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대관병식에 참석하였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박중양은 1906년 7월 궁내부 주전원 경위국 경무관으로 종사하였다. 1906년 경상북도 대구군수로 부임하였으며 공석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를 겸하였다. 당시 박중양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대한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과 제휴하여 혁구개신(革舊改新)[낡은 것을 혁파하여 새로이 고침]이란 명목 아래 추진한 대구읍성의 철거였다.

박중양은 대구 시가 도로 개수, 관찰부 및 대구군 관할의 공해[건물] 방매, 대구시장 개선 등을 추진하여 전통적 대구의 도시 구조를 식민도시의 형태로 바꾸어 갔다. 박중양은 1906년 8월 통감부령 제28호에 의하여 대구에 이사청(理事廳) 설치가 공포되고, 1906년 9월 15일 이사청이 경북관찰부의 선화당에 개청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경북 관찰부의 건물을 일본 군대 및 이사청 부속 기관에 무상 제공하였다.

박중양은 1907년 6월에 평안남도관찰사로 영전하여 부임하고, 일본군의 의병 탄압 지원과 의병 회유 공작을 벌였다. 박중양의 행적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 논설은 ‘박중양의 참혹한 심술’이라 비판하였다. 박중양은 의병 탄압에 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박중양은 1908년 8월 경상북도관찰사로 금의환향하였다. 박중양은 경상북도 관내 의병 실태와 토벌 상황을 조사하여 내부대신과 경무국에 보고하였다. 또 공소원 건축을 명분으로 경상북도 관찰부의 객사를 철거하였다. 대구 군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자위대를 구성하였고, 「중양타령」이라는 노래로 박중양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박중양은 1909년 시가지 간선도로 개설 사업으로 경상북도관찰부를 관통하는 대구 최초의 십자 도로를 개통하였다. 일본인 민회는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박중양에게 금시계를 선물하였고, 일본인들은 박중양을 대구의 은인으로 평가하였다.

박중양은 1910년 10월부터 1915년 3월까지 충청남도 장관을 지냈다. 그 사이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종5위], 1913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박중양은 1915년 3월 31일부터 1921년 2월 12일까지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찬의를 지냈다. 박중양은 1919년 4월 독립 만세 운동을 방해할 목적의 대구자제단 결성에 앞장서고, 단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다시 일제의 부름을 받아 황해도지사를 거쳐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로 임명되었다. 박중양은 1924년 1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 결혼식에 조선총독부 지방장관 대표로 참석하였다. 박중양은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昭和]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박중양은 1933년 6월부터 1941년 5월까지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중추원 내에 설치된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1933년 10월 1일 영남명덕회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을 맞아 일제로부터 기념 표창을 받고 부상으로 은배 1조를 받았다. 박중양은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이 되었으며, 1941년 5월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박중양은 1941년 6월 중추원 회의를 마치고 부의장 이진호 등 의원 전원과 함께 ‘정성만큼은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는다’며 부여 신궁 공사 근로봉사에 참여하였다.

박중양은 전시체제기에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여 및 고문,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지원병 및 징병제를 적극 선전하였다. 1945년 4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45년 7월 준군사 단체인 조선국민의용대 총사령부의 고문에 위촉되었다. 박중양은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기념하여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하여 싱가포르에 갔다.

박중양은 최상급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7명의 반열에 올랐다. 1949년 1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된 뒤 대구 침산동 오봉산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박중양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활동 시한이 단축되고, 반민특위가 해산하면서 법적 처벌을 피하였다.

박중양은 1959년 4월 23일 사망하였다.

박중양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되었다.

[학문과 저술]

박중양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일기 형식의 회고록 『술회(述懷)』를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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