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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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範坤 |
영어공식명칭 | Chae Beomgon |
이칭/별칭 | 기언(箕彦),미은(渼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811년 - 채범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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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67년 - 채범곤 사마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875년 2월 20일 - 채범곤 사망 |
거주|이주지 | 채범곤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수학|강학지 | 채범곤 수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묘소|단소 | 채범곤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 |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채범곤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언(箕彦), 호는 미은(渼隱)이다. 고려 중엽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蔡先茂)의 후손으로, 5대조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인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이며, 할아버지는 채윤복(蔡允復), 아버지는 채영국(蔡榮國),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로, 최진구(崔鎭九)의 딸이다. 부인은 일직손씨(一直孫氏)로 손익진(孫益振)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채석현(蔡錫玄)이고, 딸은 정치훈(鄭致薰)·윤동박(尹東博)·김태년(金泰年)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채범곤은 1811년(순조 11)에 태어났다. 채범곤의 집안은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어렸을 때 부친 채영국과 숙부 채화국(蔡華國) 두 사람에게서 학업을 익혔다. 이때 『통감절요』를 읽었는데, 배운 것을 잘 외웠을 뿐만 아니라 뜻까지 훤히 이해하였다고 한다. 16세이던 1826년(순조 26)에 일직손씨에게 장가를 간 이후로는 장인인 손익진에게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 4) 57세 늦은 나이로 식년시 생원에 합격한 이후 두문불출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닦았다. 이후 덕현(德峴)에 터를 잡아 우거하면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하다가, 얼마 뒤에 고향인 미대리에 돌아와 5대조 채선견의 정자인 성재정(盛才亭)을 장수처로 삼고, 왕래하며 성리학 관련서적들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였다. 매양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뜨면 『주서절요』속 긴요한 말을 외우며 세상의 영욕과 득실을 잊었다고 한다. 당대 영남의 학자인 정사화(鄭思和)·임태로(林泰魯)·최완술(崔完述)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875년(고종 12) 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
[학문과 저술]
채범곤이 남긴 『채범곤일기(蔡範坤日記)』2책이 있다. 『채범곤일기』는 채범곤이 1865년(고종 2)과 1866년(고종 3) 두 해 동안의 일상을 기록한 것으로, 가족 및 문중 행사, 교유관계, 농사 및 경제활동, 혼인, 장례 및 제사, 시문 창작, 풍속, 여가활동, 역사적 사건 등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까지 사대부의 일상생활이 망라되어 있다.
[묘소]
채범곤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집 동쪽의 호봉(狐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