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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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表忠壇 重修記 |
영어공식명칭 | Records of Pyochungdanjungs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표충단중수기」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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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표충단중수기」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표충단중수기」간행 |
배경 지역 | 「표충단중수기」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성격 | 잡기류|중수기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신숭겸장군 유적 내에 있는 표충단을 중수한 뒤 적은 중수기.
[개설]
최상룡[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표충단중수기(表忠壇重修記)」는 두 단락으로 나눠져 있다. 표충단 소개와 중수 경위를 밝히는 단락, 표충단 중수의 의의를 밝히는 단락이다.
[내용]
「표충단중수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달구벌 북쪽으로 20리[7.9km]에 표충원이 있다. 표충원 앞에 단이 있는데, 곧 장절공 신숭겸 선생이 목숨을 바친 곳이다. 아! 선생의 정충(精忠)과 높은 절개는 천년 세월 하루 같음이 전인(前人)[이전 사람]들의 시문(詩文)에 갖추어져 있다. 이 우뚝한 제단은 세월이 오래되어서 외관이 상하고, 주변엔 잡초가 우거지고 엉망진창이어서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탄식한 지 오래되었다.
기묘년(1819) 봄 2월에 선생[신숭겸]의 28대손 의직[신의직]이 본주의 진장(鎭將)이 되어 와서 사당에 알현하고 이리저리 둘러보고 마음이 아파 새롭게 수리할 것을 생각하였다. 인부들과 감독을 내어서 오래된 곳을 증축하였다. 너비는 수십 걸음이고, 높이는 십몇 척이요, 3층으로 쌓고 돌을 깎아 비를 만들었다. 이름하길,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高麗壯節申公殉節之址)[고려 장절 신공이 순절한 터]’라 하였다.
표충서원(表忠書院) 네 글자를 써서 문 가운데에 걸어두었다. 원우(院宇)[서원, 사우, 정사, 영당 따위를 통틀어 이르던 말]와 단유(壇壝)[제사를 지내는 터]가 새것처럼 빛나니 이에 길가는 사람들이 보고 모두 “위대하도다! 진장의 뜻이 선조의 열효를 드날리고 큰 의충을 펼치는구나! 이 사람이 장차 세상에 큰일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고려 구백여 년을 뛰어넘어 이 단이 다시 우뚝해진 것은 진장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장절공이 한 것이다. 장절공의 충절과 열기(烈氣)가 천지를 두루 다스리고 만고에 밝고 밝으니, 바로 이른바 ‘죽음을 따라서 멸망하지 않고 태어남을 기다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특징]
「표충단중수기」는 간략한 문체로 표충단 중수의 경위에 대한 핵심적 내용을 전달하고, 대화체로 표충단 중수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표충단중수기」는 표충단이 경상도 관찰사이자 신숭겸 장군의 외후손인 유영순(柳永詢)이 세운 1607년부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 실시로 표충사가 사라지는 1871년까지 표충사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