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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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黌堂講會韻 |
영어공식명칭 | Hoengdang Ganghoeu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횡당강회운」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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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횡당강회운」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횡당강회운」간행 |
배경 지역 | 「횡당강회운」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한시|근체시|칠언율시 |
작가 | 최상룡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 학자 최상룡이 향교 강회에서 소회를 읊은 한시.
[개설]
최상룡[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횡당강회운(黌堂講會韻)」는 8행으로 이루어진 칠언율시이다. 최상룡의 문집 『봉촌선생문집(鳳村先生文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횡당강회운」 전문 내용이다.
규숙증휘달구동(奎宿曾輝達句東)[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 일찍이 달구벌에 빛나니]/십현배출잉여풍(十賢輩出剩餘風)[십현이 배출되어 남아있는 풍습이 넉넉하구나]/
천년대학규모득(千年大學規摸得)[천년토록 큰 학문하는 규모를 얻으니]/일체제생강설동(一體諸生講說同)[여러 유생들은 한 몸처럼 학문이 동등하구나]/
진퇴성현랑무리(進退聖賢廊廡裏)[성현들이 낭무 안에 드나들어]/종용금고전분중(從容今古典墳中)[고금의 책속에서 넉넉하구나]/
하당차회종여시(何當此會終如始)[어찌 이 모임의 끝을 처음과 같이 감당할까]/무부오인일괴공(毋負吾人一蕢功)[우리들은 한 삼태기의 공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특징]
「횡당강회운」은 1·2·4·6·8구(句)에 동(東)계열의 운자를 두었다.
[의의와 평가]
「횡당강회운」은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세세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끝내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다. 이는 마치 아홉 길 산을 만들 때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불긍세행(不矜細行) 종루대덕(終累大德) 위산구인(爲山九仞) 공휴일궤(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온다. 「횡당강회운」 미련(尾聯) 외구(外句)에 『서경』 「여오」에 나오는 고사를 활용한 것으로 봐, 「횡당강회운」은 최상룡의 학문하는 자세와 삶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