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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유림단 사건[달성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21
한자 第二次 儒林團 事件[達城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중국 북경에서 김창숙과 이회영이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
종결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대구 복심 법원에서 관련자 재판
발생|시작 장소 중국 북경
종결 장소 대구 복심 법원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창숙|이회영|이봉로|김화식|송영호

[정의]

1925년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역사적 배경]

1925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즉각적인 독립 전쟁은 어려우니 장기적인 독립 전쟁 전략을 구상키로 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열하(熱河)나, 찰합이(察哈爾) 등의 황무지를 구입, 경작하면 재만 동포의 이주가 가능하고 아울러 무장 실력을 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중국 인사나 해외 동지들과 협의하였으나 방도가 없자 경상북도 지역 유림들과 협의한 끝에 국내에서 자금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경과]

1925년 음력 3월부터 5월까지 김창숙은 송영호, 이봉로, 김화식 등과 전후 4차례에 걸쳐 모임을 가지면서 계획을 세워나갔다. 2개월 가까이 여관을 전전하며 이들은 장기적인 독립 투쟁이라는 기본 방향을 정하고 먼저 중국 지방에 유랑하는 동지와 조선인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 순차적으로 무장 실력을 양성함과 동시에 무관 학교를 설립한 후 군인을 길러낼 것, 기회를 보아 조선으로 진입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경제 문제와 군대 양성을 위한 방법으로 4월 초순 3·1 운동 당시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제출한 영호남의 유림 130여 명을 상대로 20만 원의 모금액을 장만하기로 하였다. 당초 전국에 산재한 조선인 동포를 대상으로 널리 모금을 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이는 이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대상을 영호남의 파리 장서 참가 유림으로 좁힌 것이다. 130명 가운데서도 신망있는 사람을 모집원의 주축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봉로는 해외 연락책, 김창숙은 모집 총책, 김화식은 무기 운반책과 행동책, 송영호는 입국 경비 조달과 행동책으로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결과]

제2차 유림단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고, 달성 출신 이봉로(李鳳魯)[1902~1940]는 1927년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봉로에게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림계가 주도한 제2차 유림단 사건은 일제 강점기 민족 독립운동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크게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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